▲고노 요헤이. 2006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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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담화는 일본 공권력의 개입을 인정한 데 이어, '위안부' 모집 자체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는 점도 부정하지 않았다. 위 문장의 이어지는 부분이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의 참혹한 것이었다."
그렇게 자국의 책임을 시인한 뒤, 이 문제가 여성 인권을 침해한 사안임을 인정하면서 공식적인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어쨌거나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그 출신지가 어디인지를 불문하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일본의 사과 발언이 집중된 시기
당시는 세계적으로 혼란스러웠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미·소 이념대결이 사라지면서, 그간 억제됐던 세계 각 민족들의 이해와 요구가 동시에 폭발했다. 유고 내전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분쟁이 동유럽에서 빈발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또 담화가 발표된 1993년 8월은 제1차 북·미 핵위기가 발생한 지 5개월 뒤였다. 세계질서가 요동치는 혼란 속에서 뜻밖에도 일본에서 긍정적인 발표가 나왔던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고노 담화를 깨트리려 시도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는 뒤엎지 못했다. 한일관계 파탄이 한미일 삼각동맹 균열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견제 때문이었다. 일본 우익이 그처럼 깨트리고 싶어하는 고노 담화가 일본사회당(지금의 사회민주당) 같은 진보정당이 아니라 아베 신조의 당인 자민당에서 나왔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만하다.
'위안부' 문제는 1991년 8월 14일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본격 제기됐다. 그로부터 약 2년 만에 고노 담화가 나왔다. 강제동원이나 역사 교과서 문제 등에 비해 일본의 사과가 비교적 빨리 나온 분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노 담화의 당사자인 미야자와 내각뿐 아니라 당시의 일본 내각들은 역사 문제에 대해 유난히 많이 사과를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일본 총리들의 소신표명연설(소신연설)을 분석한 양기웅·안정화의 '탈냉전기 일본 총리의 한반도 및 한일관계 인식 변화(1991-2013): 국회 소신표명연설 분석'은 "소신연설에서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발언이 가이후 총리에서 무라야마 총리 시기에 집중"됐다고 분석한다.
자민당 출신의 가이후 도시키 내각(1989년 8월~1991년 11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1991년 11월~1993년 8월 9일), 일본신당 출신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1993년 8월 9일~1994년 4월), 신생당 출신의 하타 쓰토무 내각(1994년 4월~6월), 일본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도이치 내각(1994년 6월~1996년 1월)이 존재했던 시기에 일본 정부의 사죄 발언이 집중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가이후·미야자와 내각은 자민당 단독 내각이고, 호소카와·하타·무라야마 내각은 연립 내각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 정부의 사죄 표명이 특정 정당이 아니라 여러 정당의 합작품이었음을 의미한다. 일본 정치권이 사죄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정치대국을 꿈꾼 일본
당시 일본 정치권이 역사문제에 대해 전향적 자세를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와도 관련돼 있었다. 1990년대 초반의 세계적 혼란기를 활용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고자, 일련의 사죄 발언으로 역사 문제를 털어버리려 했던 것이다. 위 논문은 '일본이 정치대국(상임이사국)이 되고자 과거사를 사과했다'는 가설에 입각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시기의 전향적인 역사 발언은 미야자와 내각부터 본격화되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목표와 관련이 있다는 정치대국 가설도 제시할 수 있다. 미야자와 정부는 92년 7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의사를 처음 표명했다. 그리고 92년 6월에는 PKO 협력법을 제정했고, 92년 6월 12일 UN 환경개발회의에서 세계경제 번영과 지구환경 보전 등 현안 해소를 위한 공헌 확대를 약속하면서 92-96년간 개도국 환경 공적개발원조(ODA)를 위한 1조엔 공여 계획을 발표했다." - 한림대 일본학연구소가 2014년 발행한 <한림 일본학> 제25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