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후 정치사>의 표지
후마니타스
보수 우위와 재무장 반대 여론
일본에서 혁신 세력 혹은 비자민 세력이 정권을 잡은 적은 몇 번 있지만, 보수 우위의 구도는 전후 계속된 현상입니다.
1947년 사회당이 제 1당에 오르면서 사회당이 최초로 제 1당이 됩니다. 하지만 이때 사회당의 의석은 144석, 공산당까지 합하면 148석으로 총의석 수인 466석의 3 분의 1 가량만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회당은 다른 보수 정당과 연립하여 내각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수와 혁신의 2대1 구도가 이때부터 형성되었던 것이죠.
가타야마는 총선거 직후에 "차기(사회당) 정권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담장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하지만 여당세력 307석 중 사회당은 47%로 그 반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성립되는 '55년 체제'의 실체인 '1과 1/2 정당제'(또는 양대 정당제)의 구성에 필요한 세력 배분은 부활된 제 1회 중선거구제 선거 때부터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각 당의 득표수를 보면, 사회당은 약 702만 표로 유효득표율의 26.3%, 즉 1/4만을 얻었을 뿐이다. - p.69
일본의 정치 세력 배분은 보수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지만,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습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엄청난 피해를 입은 뒤 패전하고 나서야 전쟁이 끝났고, 전쟁 중에도 일본 국민들은 엄청나게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일본 재무장과 정상국가화에 대한 여론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의 일부 우익 정치인들이 일본 재무장을 시도했지만, 좌절된 바 있죠.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재무장 관련 문제로 인해 퇴진하기도 했습니다.
하토야마의 자유당은 헌법 9조를 개정해 확실하게 군대를 만들자고 주장했고, 개진당도 기요세 이치로 등 일부 개헌 반대파를 제외하면 대체로 개헌과 재무장을 주장하고 있었다. (...) 선거 결과 국민 여론은 재무장 반대쪽으로 근소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하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스즈키 모사부로 위원장이 외친 "청년이여, 총을 들지 말라! 부인들이여, 남편과 자식을 전장으로 보내지 말라!"라는 구호가 패전의 고통으로부터 7년여를 지내온 국민들의 정서에 적중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 p.99
기시는 (...) 헌법 9조를 개정해 일본이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면, 안보조약도 일미 간의 쌍무적인 상호방위로, 즉 대등한 내용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이 양대 과제가 기시의 생각대로 수행될 경우 일본이 전전과 같은 군사국가로 부활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 p.121
고이즈미 이후 일본 정치의 변화
일본의 정치권도 보수 우위의 구도였지만, 합리적으로 이어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당 내부에는 서로 다른 파벌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자민당이 계속 정권을 잡고 있었지만, 당 내부의 파벌로 '절대 권력'이 없었죠. 가토 고이치, 노나카 히로무,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아베 신타로, 고노 요헤이 등 일본의 수많은 정치인들이 파벌을 이루고 서로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이런 일본의 정치적인 맥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파벌 정치에 문제가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파벌 간의 견제로 인해 일본의 정상국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협력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와 고노 외무상의 아버지인 고노 요헤이가 파벌 정치 당시 일본의 유력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식민지배의 역사를 왜곡하는 수정주의자들도 엄청난 견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등장 이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기존 일본의 정치적인 구도가 깨지고, 새로운 판도가 짜이기 시작합니다.
모리 내각의 타성에 젖은 채질을 비판했던 다나카 마키코, 이시하라 노부테루 등 젊은 일본 정치인들은 파벌을 초월해 고이즈미를 지지했다. (...) 하지만 고이즈미는 전국 각지의 유세에서 일반 국민들에게 직접 다가가 개혁론을 호소했고, 이를 통해 모리 정권에 등을 돌렸던 국민들의 기대를 다시 모았다. - p.258
고이즈마가 주창하고 있던 구조 개혁론의 양대 표적은 다나카 가쿠에이에서 하시모토파로 이어지고 있던 이권정치, 그리고 관료였다. 그의 언동은 기존 정계의 상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듯이 보였거, 강한 혁명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 p.259
고이즈미 총리의 '청산 작업'은 자민당 내부 및 내정만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외교에서도 기존의 노선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죠. 즉, 일본을 정상국가화하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현재 아베 총리도 고이즈미의 이런 노선을 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이즈미 정권이 큰 전환을 일으킨 것은 외교 및 안전보장 정책이었다. 그 계기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동시다발적인 테러였다. (...) 일본은 미국의 군사행동을 지지하기 위해 <테러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자위대를 인도양에 파견해 미군을 지원했다. - p.262
고미즈미 정권은 이에 따라 2003년 6월, 분쟁발생시 지방자치제나 민간의 협력의무, 자위대의 행동에 관한 권한 등을 규정한 유사법제를 제정했다. 전후 일본이 지켜온 평화국가 노선이 고이즈미 정권에 의해 크게 전환된 것이다. - p.264
고이즈미 정권은 내정과 외교 양 측면에 걸쳐 전후정치의 청산을 추진해 왔다. (...) 외교 및 안보에 관해서는 헌법 9조에 의해 견지되어 온 평화국가의 노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2000년부터 중-참 양원에 헌법조사회가 설치됨에 따라 헌법개정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어 왔다. - p.269
이렇게 일본의 정치 구도는 고이즈미 이후 굉장히 많이 변합니다. 일본 우익의 역사 수정주의 세력이 커지고, 평화헌법 개정에 따른 정상국가화가 추진되는 배경도 여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의도대로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 즉 인권을 옹호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대우받아 정상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 식민지배와 전쟁 피해 문제를 해소하고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정주의자들에게 한국은 '거슬리는 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케임브리지 국제문제 리뷰>에 개제된 논문 <일본 수정주의자들과 '한국이라는 위협'>에서 쇼고 스즈키 교수는 일본 우익의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한국을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느낀다고 언급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고이즈미 이후 일본의 정치 지형 변화와 이에 따라 세력이 커진 일본 역사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현재 아베 정권의 비합리적인 한국 화이트 리스트 제외 조치가 나오고, 식민지배 및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과거사 왜곡이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깝지만 먼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는 책
이시카와 마쓰미의 <일본 전후 정치사>는 <아사히 신문>에서 오랜 기간 정치부 기자로 일하면서 정계의 사건들을 자세하게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젊은 시절부터 원로 정치인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서 그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이시카와 마쓰미가 경험한 것만을 바탕으로 쓴 책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이 방대한 사실 중 일부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책을 쓰는 과정에서 선행기록과 연구논문들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일본 내 혁신계 지식인들의 입장을 계승한 이시카와 마쓰미의 주관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 전후 정치사>는 기본적으로 일본 정치사를 평론한다기 보다는 일본 정치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독자가 읽어가며 나름대로의 생각을 많이 해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최근 화이트 리스트 배제 조치와 불매 운동 상황 때문에 읽지 않아도 "가깝지만 먼 나라"인 일본 정치의 기본적인 전개 과정과 구도를 살펴보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전후정치사 - 일본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전개
야마구치 지로, 이시카와 마쓰미 (지은이), 박정진 (옮긴이),
후마니타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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