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군 시신이 채반의 누에처럼 널브러져 있다(1951. 5. 17.). ⓒ NARA
수면 위로 떠오른 정전협상
이 시기 미국은 적절한 정전협상으로 한국전쟁을 종결하고자 했다. 소련의 전쟁 개입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만일 소련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것은 불 보듯 분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38도선을 회복하자 전쟁 이전 상태로 돌려놓고 싶었다.
중국 역시 한국전 참전 이후 엄청난 병력의 손실이 있었다. 한반도에서 미군을 축출해낸다는 애초의 목표는 달성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중국은 정전회담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역시 더 전쟁하기에는 한계점에 이르렀다. 특히 밤낮없이 계속되는 미군의 공습으로 북한지역은 성한 건물 하나 남아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한국의 이승만 정부만이 어린 학생까지 앞장세워 휴전 반대를 외치게 했다. 하지만 이들 세 나라는 더는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게 불가능함을 인지했다.
이번 회는 1951년 5월의 전쟁 현장을 담았다.
▲ 거제 포로수용소 전경(1951. 5. 7.). ⓒ NARA
▲ 영국군 폭파조가 북한의 한 철길을 폭파하고자 폭약 매설작업을 하고 있다(1951. 5. 10.). ⓒ NARA
▲ 주민이 불타버린 집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다(1951. 5. 14.). ⓒ NARA
▲ 유엔군들이 피란민 움집을 찾아 적정을 묻고 있다(1951. 5. 17.). ⓒ NARA
▲ 중국군 시신들(1951. 5. 17.). ⓒ NARA
▲ 중국군 시신(1951. 5. 17.). ⓒ NARA
▲ 중국군 시신들이 계곡에 쌓여 있다(1951. 5. 17.). ⓒ NARA
▲ 투항하는 중국군들(1951. 5. 21.). ⓒ NARA
▲ 한강 철교 복구공사(1951. 5. 23.). ⓒ NARA
▲ 매몰 직전의 중국군 시신들(1951. 5. 23.). ⓒ NARA
▲ 부산, 여학생들이 휴전 반대 데모에 나서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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