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 하의 조선경제>.
김낙년, 도쿄대학출판회
이 책에 대해 야마모토 유조 교토대 명예교수가 쓴 서평이 일본 정경사학회(政經史學會)가 2004년 발행한 <역사와 경제(歷史と經濟)>지에 실렸다. 서평에서 야마모토는 "제국주의 하의 자국 역사를 냉정하게 서술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김낙년 교수의 글을 소개한 뒤 "그것이 지금 김낙년씨에 의해 이 책의 형태로 실현된 것을 축하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일제 식민지배를 제삼자 관점에서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면서 야마모토는 "일·한 양국 학계가 식민지 경제사를 향한 하나의 접근법으로서 이번 성과를 공유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낙년 교수의 관점이 한·일 양국에서 두루 공유될 수 있기를 희망한 것이다.
"한국인 공장 많아졌다"면서 식민지배 미화... 실상은?
야마모토의 극찬을 받은 김낙년 교수가 품고 있는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본은 먹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맘껏 착취한 뒤 버리려 했던 게 아니라 일본과 하나로 만들기 위해 한국을 개발하려 했다는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 제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동화주의를 추구했습니다. 식민지에 일본의 제도를 이식하고, 가능한 한 두 지역을 동질화해서 결국에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고자 한 것입니다. 조선을 완전하고 영구하게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요."
똑같은 생각이 이영훈 교수의 글에도 나타난다. 이 책 제2장에서 이 교수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토지 수탈로 이해하는 한국인들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제의 조선 병합은 몇 조각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총 면적이 2300만 헥타르가 되는 한반도 전체를 그의 부속 영토로 영구히 지배할 목적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조선인 전체를 일본인으로 완전 동화시킬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법과 제도를 이 땅에 이식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전국의 토지가 얼마인지, 토지의 형질이 어떠한지,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그것이 토지조사사업입니다."
일제의 동화정책을 표현하는 한마디가 바로 내선일체(內鮮一體)다. 일본(內)과 조선(鮮)은 하나라는 이 구호는 중국 침략을 원활히 전개할 목적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식민지 한국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 대륙에서 전쟁을 수행하고자, 한국인들의 반발을 사전에 무마하려고 내세운 논리일 뿐이었다.
그 내선일체로 표현되는 일본의 동화정책이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게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인식이다. 그게 진심이었다 해도 문제가 되고, 빈말이었다 해도 문제가 된다.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을 근거로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식민지배를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문제점에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소신껏' 개진한다.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기 위해 벌인 노력을 열심히 소개한다. 김낙년 교수가 제시한 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 화폐 통합이다. 일본이 조선은행권과 일본은행권을 1:1로 교환시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둘째, 시장 통합이다. "조선과 일본 간에는 거의 모든 관세가 폐지되었습니다"라면서 "몇 개 품목은 예외로 두었지만, 그것도 점차 폐지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셋째, 법률적 통합이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일본과 식민지의 법률제도가 통합됐다고 말한다. 일본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어느 침략국이든지 다 시도하게 돼 있는 이런 것들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화폐·시장·법률 차원에서 전개된 그런 시도들로 인해 식민지와 일본의 지역 통합이 촉진됐고, 그 결과로 두 지역이 지금의 유럽연합 수준에 도달했다는 게 김낙년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지역 통합은 일본제국 전체로 확대되었는데, 현재의 유럽연합인 EU와 닮아 있기 때문에 그것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EU는 참가국이 자신의 경제주권의 제약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이지만, 일본의 지역 통합은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역내의 각 지역이 완전히 개방되어 상품과 자본과 노동이 보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역내의 경제 변화가 급속히 촉진된다는 점에서는 EU와 동일한 효과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경제통합의 결과로 식민지 한국의 경제 변화가 급속히 촉진됐다고 김낙년 교수는 말한다. 그가 그 증거로 예시하는 것들 중 하나는 한국인 공장의 숫자가 늘었다는 점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공장 수의 추이를 보면, 합병 초기에 조선인 공장 수는 보잘 것 없었고, 1920년대까지 일본인 공장 수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후에는 급증해서 일본인 공장 수를 능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식민지배 기간 동안에 한국인 공장 숫자가 일본인 공장을 결국 능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기업체 숫자는 일본인의 것이 훨씬 많았지만, 공장 숫자만큼은 한국인의 것이 더 많았다는 점을 김낙년 교수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한국인 인구가 일본인 인구보다 많은 한반도에서 한국인 공장이 더 많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바로 뒷부분에서 자기주장을 스스로 퇴색시키는 말을 한다는 점이다.
"다만, 자본금 규모로 보면 일본인 회사가 압도적으로 컸으며, 대규모 자본이나 근대적 기술이 요구되는 산업에서는 일본인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자본금 규모에서는 일본 공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공장 숫자만큼은 한국인 공장이 더 많았다는 게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인 공장의 숫자가 더 많았는데도 자본금 규모에서는 일본인 공장이 압도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 공장들이 불리한 조건에서 운영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인 공장들이 일당백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공업 분야에서 민족차별이 심각했고, 일본이 선전한 내선일체가 그야말로 허구에 불과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론가 그룹의 논리가 이렇게 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