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에서 주최한 방한간담회에서 홍콩의 상황을 설명하는 얀 호 라이 민간인권전선 부의장
김민형
곧이어 라이 부의장이 이야기가 시작됐다. 첫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담이었다. 라이 부의장은 현재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동시에 홍콩의 가장 규모가 큰 연합조직인 '민간인권전선(CHRF)'의 부의장으로 직접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이었다. 민간인권전선에는 홍콩의 시민사회단체와 정당을 포함해 48개의 그룹이 함께하는, 홍콩 최대 규모의 연합조직이다.
그가 맨 처음 꺼낸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한국의 영화 이야기였다. 그는 1988년생으로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했다. 오히려 한국 영화를 통해 홍콩의 시민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대해서 접하고 배우게 된다고 전했다. 바로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 세 영화다. 그는 이들 영화가 홍콩에서 권력을 거스르고 저항한다는 의미를 가진 '역권(逆權)운동'의 상징적인 영화라고 힘주어 말했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라이 부의장이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2002년부터 벌어진 국가안전법(홍콩기본법 23조) 반대운동이었다. 그의 나이 15세였던 중학생 시절의 일이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매우 흡사한 성격을 가진 이 법은 홍콩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과 사상, 종교, 언론·출판의 자유를 강력히 제한하고 처벌하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사실 이 법안은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될 당시 중국 정부에 의해 홍콩 기본법으로 제정될 예정이었으나 홍콩 시민들의 거센 반발로 유보됐던 법안이다.
그 당시 봤던 수십만 명의 시위 인파는 어린 그에게 놀라운 경험이었다. 당시 50만 명에 달하는 홍콩 시민들이 참여한 이 시위는 홍콩 민주화운동 역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작이 됐다. 그는 "작은 시민의 힘일지라도 함께 모이면 거대한 권력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성취였다"라고 회고했다. 홍콩 민간인권전선은 이 반대운동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2002년 9월에 결성됐으며, 라이 부의장 자신도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됐다.
홍콩 민주화세대, 삼보일배를 배우다
라이 부의장은 홍콩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크게 세 번의 중요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시기는 1984년 홍콩의 중국 반환 협정 체결 이후 2003년 국가안전법 반대운동까지다. 이 시기에는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는 대중적인 민주화운동의 경험이 축적됐다. 민간인권전선이 결성되는 계기가 됐다.
두 번째 시기는 2003년 국가안전법 반대운동 이후 2012년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을 때까지의 기간이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시민운동이 홍콩 민주화운동에 실질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라이 부의장의 분석이었다.
그것은 2005년 일어났던 한국 농민들의 세계무역기구(WTO) 홍콩회의 반대시위였다. 당시 한국 농민조직은 홍콩 현지에서 매우 적극적인 저항 캠페인을 보였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삼보일배 행진을 꼽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경찰 당국의 물대포·최루탄 진압에도 불구하고 대항했던 방식, 그리고 WTO 국제회의장을 둘러싸고 시위하는 한국 농민의 모습은 당시 홍콩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홍콩 민주화운동가들은 한국 농민들의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홍콩에서는 이런 운동방식을 '용무운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중 한국의 삼보일배 운동은 '구보일배'와 같은 형식의 시위 방법으로 진화됐다. 2010년 중국-홍콩간 고속철 도입 반대운동이 벌어질 때 홍콩의 젊은 시위대들은 구보일배를 통해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라이 부의장은 "한국의 농민시위는 홍콩입법회(의회)를 포위하고 점거하는 시위방식에 영향을 끼쳤다"라며 "중학생이었던 내게 당시 한국 농민시위는 큰 감명과 영감을 줬다"라고 설명했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2012년 중국의 교과서 개편에 반대하는 학생운동부터 2014년 우산혁명을 거쳐 최근의 중국송환법 반대시위로 촉발된 2019년의 민주화 시위까지의 과정이다. 라의 부의장은 "세 번째 시기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 바로 죠수아 웡과 같은 홍콩의 젊은 정치인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홍콩인 정체성을 강조하는 학생과 청년세대 운동이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세 번째 시기의 역사적 계기가 된 사건은 바로 2004년 79일간 진행됐던 '우산혁명'이었다. 중국 중앙정부가 홍콩 행정장관의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이 시위는 학민사조, 홍콩학생연맹 등과 같은 조직처럼 학생과 청년들을 홍콩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등장시키게 했다. 이 과정에서 홍콩의 야당인 공민당, 사회민주연선, 데모시스토와 같은 민주파 의원들도 참여하게 됨으로써 행정장관 직선제라는 뚜렷한 목표를 갖는 정치운동이 시작됐다.
홍콩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특징을 홍콩반환 협정체결 이후 30여 년간 세 차례에 걸친 역사적 계기을 매개로 설명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와 전개 과정이 한국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연결돼 발전하는 맥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 역사의 보편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해소되지 않은 질문 하나가 있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한국의 민주화세대, 특히 제도정치권에 진입한 엘리트 정치인들은 지금의 홍콩민주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응대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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