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2009년 11월 8일,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참석자들이 '친일청산','친일타도'가 적힌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유성호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계속 주장한 식민지 근대화론이 앞서 설명한 논리 중 하나다. 하지만 '일본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잘살게 됐다'는 이 논리는 널리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 논리가 객관적 역사와 상반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런 논리를 펴는 것 자체를 죄악시한다. '뭐야? 일본 덕분에 잘살게 됐다고?'라며 그런 논리를 꺼내는 사람의 인격을 의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지간인 안병직·이영훈 두 교수가 의욕적으로 내세우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확장성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꽤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해온 논리가 하나 있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을 비롯해 뉴라이트(신우익)들이 공통으로 구사하는 '친일청산=공산주의' 논리다.
이 논리가 사용된 지는 꽤 오래됐다. 1948년에 국회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청산을 개시하자, 친일 극우세력이 내세운 방어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1948년 8월 27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친일파들은 "반민족자를 처단한다는 자는 공산당 주구다"라는 삐라를 살포하고 다녔다. 이런 일은 당시 수없이 발생했다.
친일청산을 빨갱이와 연결하는 접근법은 냉전시대가 사실상 끝난 2010년대에도 계속 구사되고 있다. 지난 9월 19일 연세대 사회학과 강의 때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부에 빗댔던 류석춘 교수도 그런 접근법을 쓰고 있다. 그는 친일청산이 모범적으로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는 북한을 겨냥해, '친일청산이 공산혁명의 도구로 쓰였을 뿐'이라고 폄하했다. 2013년 <시대정신> 봄호에 게재된 '북한 친일청산론의 허구와 진실'의 한 대목이다.
"북한이 했다고 선전하는 친일청산이란 친일청산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반공 혹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과 청산이었을 뿐이다. 공산혁명에 저항적이었던 유산계급의 재산을 대상으로 한 '재산 빼앗기' 과정이었고,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만드는 데 반대한,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에 대한 숙청 과정이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정권의 친일청산이든 자본주의 정권의 친일청산이든, 나름의 목적에 맞게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일청산이 곧 공산혁명이 되거나 부르주아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친일청산은 공산당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과 싸웠던 장제스(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역시 소극적이나마 친일청산을 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제 패망 8년 전인 1937년 8월부터 한간(漢奸) 즉 친일파들을 처형했다.
일제 패망 뒤에도 그들의 청산 작업은 계속됐다. 규모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대략적 추정은 가능하다. 2007년에 <중국학보> 제55집에 실린 박상수 고려대 연구교수의 논문 '중국의 친일한간 청산 일고(一考)'는 이렇게 말한다.
"1948년의 <중화연감>에 의하면, 1945.11-1947.10 기간의 각 성과 시의 법원에서 처리한 한간 처벌 정황은 다음과 같다. 검찰 측에서 45,679건의 한간 안건을 처리했는데, 기소자는 30,185명, 불기소자는 20,055명, 기타 13,323명이었다. 각성(各省) 법원의 심판은 25,155건을 다루었는데, 그중 사형 369명, 무기징역 979명, 유기징역 13,570명, 벌금 14명이었다."
한국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사형집행이 1건도 없었다. 징역 등의 신체형 선고는 14건 있었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민당 정부는 불철저하나마 친일청산을 했다. 국민당도 친일청산을 했다면, 친일청산을 빨갱이와 연결하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친일청산=공산주의' 논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미·소 양대 진영의 냉전구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최후의 냉전 지대라고 하는 한반도에까지 평화의 훈풍이 불고 있다. 냉전의 수명이 다하면 이 논리도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을 시도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