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신채호를 비판하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이승
이영훈 등이 공저한 <반일 종족주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삼간다. 이들에 대한 언급을 하기는 하되, 노골적인 공격은 자제하는 편이다.
일례로, 김용삼 전 <조선일보> 기자가 쓴 제15장 '구 총독부 청사의 해체' 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상하이 임정 요인 유해를 봉환했고,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도 국가유공자로 지정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독립유공자들 속에 공산주의자들이 끼어 있음을 은근히 부각하는 소극적 비판을 하는 데 그친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의 논리대로라면, 독립운동가들은 항일운동, 아니 반일 종족주의의 최일선에 섰던 인물들이다. 한국을 잘살게 만드는 일본 식민지배를 몸으로 거부한 이들이다. 이 책의 논리에 입각한다면, 이들은 비판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여섯 명의 저자들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은 변호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일본 식민지배가 한국을 좋게 만들었다고 말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이 쓸데 없는 일을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감안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반일 종족주의> 안에서 실명까지 거론되면서 비판을 받는 독립운동가가 있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란 명제로 유명한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 신채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반일 종족주의> 내에서 실명이 거론되며 비판받고 있다.
신채호의 소설을 문제삼은 이영훈
이 책 제20장은 이영훈이 담당한 '반일 종족주의의 신학' 편이다. 한국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사상적 원류들을 분석하는 부분이다. 제20장의 7번째 소제목은 '신채호의 꿈하늘'이다. 신채호가 쓴 <꿈하늘>이란 소설을 근거로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이영훈의 비판이 여기서 개진된다.
서양 학문의 영향을 받아 역사학과 문학을 엄밀히 구분하는 오늘날과 달리,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양자는 명확히 나눠지지 않았다. 선비 한 사람이 문학과 사학과 철학을 두루 섭렵하는 일이 상당히 흔했다.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문학적 상상력도 동원하고 역사학적 실증도 하고 철학적 사유도 하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채호가 역사소설을 쓴 것은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편적인 정보 밖에 제공되지 않은 역사 기록만으로는 인물이나 사건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어서 역사소설에까지 손을 댔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그가 쓴 <을지문덕전>이란 소설은 역사기록으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에 대해서만 상상력을 발휘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사료의 간극을 메우고자 소설을 쓰게 됐으리라고 추론케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꿈하늘>은 다르다. 역사기록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의 <단재 신채호 전집> 하권에 실려 있는 이 소설은 50쪽 분량의 단편이다. 이 책에서는 신채호 자신의 역사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이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서술된다. 꿈속의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 속 인물들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역사의식을 키워가는 신채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반일 종족주의> 제20장에서 이영훈은 "이는 신채호가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그 내면의 변화 과정을 서술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민족주의보다는 역사의식의 성장 과정을 다룬 작품에 가깝다.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소설 속의 신채호는 을지문덕·강감찬 등과의 대화를 통해 민족주의가 아닌 역사 인식의 폭을 넓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