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6일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게시판에 '성전환' 신입생의 입학을 환영하는 대자보(왼쪽)와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대자보(오른쪽)가 나란히 붙어 있다.
연합뉴스
여러 사람에게 폭풍 같은 일주일이었을 듯합니다. 저의 경우는 지난주 집에서 라면을 먹다 실시간검색어에 이름이 올랐단 연락을 받고 놀랐습니다. 이후에는 A씨의 숙명여대 입학을 둘러싼 여러 기사와 글들을 보면서 심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미 기사로 나왔지만 A씨는 숙명여대 등록을 안 하기로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고민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A씨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들과 함께 어울리고 살아갈 거라는 점에서 당사자분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나름의 소회식으로 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존재를 부정하는 목소리
정신과에서 성주체성장애 진단에 앞서 이루어지는 심리검사 중에 '미네소타 다면적 인성 검사'(Minnesota Multiphasic Personality Inventory, MMPI)라는 것이 있습니다.
해당 검사를 통해 측정하는 척도에는 남성성-여성성이 있고, 그 결과는 진단을 내리는 데 하나의 참고자료가 됩니다. 그런데 해당 검사 질문지를 보면 '이 부분을 측정하는구나' 싶은 질문들이 보입니다. 가령 '나는 추리소설보다는 로맨스소설을 좋아한다'와 같은 질문입니다. (오래 전이라 정확한 문장은 다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따른 대답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대충 보이시죠? 그런데 문제는 제가 추리소설을 매우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즐겨 읽었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저는 당시 저 질문을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은 '그렇다'고 적은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저는 당시 의료적 트랜지션을 위한 진단을 원했으니까요.
트랜스젠더로서 살다 보면 이와 같은 상황들을 자주 마주합니다. 상대방이 소위 '여성성/남성성'에 대한 기준을 세워놓고 그에 맞춰 너를 증명하라는 요구들입니다. 제가 대리한 한 성별정정 사건에서는 판사가 "요새 머리 긴 남자도 있고 머리 짧은 여자도 있는데 그냥 살지, 왜 굳이 수술하고 정정하냐"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한테 뭐라 대답해야 할까요. 단지 헤어스타일의 문제가 아닌 관계, 노동, 일상 모두와 연결되는 이 성별화된 사회 속에서 말입니다. 질문이 조악하면 대답도 조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이미 강고한 성별고정관념을 가지고 너의 정체성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상대의 고정관념을 충족시키는 대답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입증의 요구는 병원, 법원만이 아닌 일상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입증을 남이 아닌 나 스스로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체화의 과정은 어느 날 한순간의 번뜩임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불신과 내적 설득의 과정을 거칩니다. 저 역시 그러했고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저 또한 사회에서 학습된 성별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긴 괴로움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여성의 외모는 이렇고, 행동과 성격은 어떠어떠해야 하는데 아무리 돌아봐도 저는 거기에 못 미치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 그냥 망상에 빠진 사람 아닌가' 하는 의심도 꽤 했었습니다. 심지어 트랜지션 이후에도.
그런 고민들을 해결해 준 것이 저한테는 '페미니즘'이었습니다. 누구나 도달해야 할 절대적 여성상/남성상은 없고, 이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어떻게 보면 정말 기본적인 내용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저는 자기의심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냥 '나는 나로서 살면 된다'고 여기고 편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나의 모든 행동이 허용되거나, 사회 구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 해방감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저를 비롯한 수많은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요즘 따라 더 깊은 좌절과 괴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어째서 염색체가 진지한 정체성의 호소보다 우선되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