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미친 듯이 공부했다. 나는 언니의 등 뒤에서 미친 듯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경품을 탔다. 내가 자면 언니도 졸릴 거라는 생각에 악착같이 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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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나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을 우리 집 마당에서 보게 되었다. 언니는 마당에 무릎을 꿇고 엄마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언니 옆에는 영문을 모르는 강아지 해피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자동으로 언니 옆에 무릎을 꿇었고, 이유도 모른 채 같이 눈물을 흘렸다.
언니의 간절함이 통한 건지 엄마는 언니에게 딱 '한 번의 기회'를 줬다. 언니에겐 앞으로 6개월 동안 대학 입시 공부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번 해보고 안 되면 적당한데 선봐서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했다.
언니는 미친 듯이 공부했다. 나는 언니의 등 뒤에서 미친 듯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경품을 탔다. 내가 자면 언니도 졸릴 거라는 생각에 악착같이 깨어 있었다. 당시 배우 박상원씨가 하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작가는 내 글이 재밌다며 경품은 물론 생방송 통화도 몇 번 시켜줬다.
지독한 시간이 흐르고 그것보다 더 독한 언니는 6개월이 지난 후 국립대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내 나이 스물, 언니 나이 스물넷이었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밤, 언니와 나는 밤새 이불 속에서 아카데미 4관왕을 한 봉준호 감독보다 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5세에 대학생이 된 언니는 입학하자마자 '엠티'를 갔다. 불효녀가 의리도 없다. 이래서 어리숙한 사람은 늘 손해다. 그래도 난 언니의 청춘이 이제야 빛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다. 나는 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버라이어티 쇼 방청객보다 더 격한 리액션으로 답했다.
다음 해 언니는 남자친구를 집에 데리고 왔다. 이 배신감은 뭐지? 나는 언니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 더 친밀해진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됐다. 혼란스러운 이 감정을 아무렇지 않은 척 대신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언니가 결혼해버렸다. 나는 결혼식장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결국 엄마한테 쫓겨났다. 좋은 날 재수 없게 운다고. 언니의 결혼식 사진에는 내가 없다. 가족 단체 사진에도 나는 없다.
시간은 흘러 지독하게 공부했던 언니는 선생님을 거쳐 장학사가 되었고, 언니 등 뒤에서 쓸데없는 짓이나 하던 나는 간호사를 거쳐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돌아보면 모든 게 운명이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내가 글을 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40대 후반 문하연, 계속 글을 쓰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는 현재를 보면 안다'는 말이 맞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이런다고 될까'라고 나 자신을 의심할 시간에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건 나에게 하는 소리다.
지난주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모 방송국 드라마 피디를 만났다. 석 달 전, 그는 내가 쓴 드라마의 단점만 요목조목 짚어서 말했다. 하마터면 '그렇게 잘 아시면 직접 쓰지 그래요'란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후로 나는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다. 그분의 뼈아픈 충고 때문이 아니라 이것밖에 안 되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그는 현실적인 조언과 함께 뜬금없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놀라운 건 그와 내가 나눈 대화가 지금 상영 중인 영화 <작은 아씨들>에 그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 프리드리히 교수는 조 마치가 신문에 연재한 글을 보며 '자신만의 고유성이 없다'고 비평한다. 조 마치는 자신이 팔기 위한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지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왈칵 눈물을 흘렸다. 문득 '내가 저런 모습이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