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요정 김복주>에서 주인공 김복주(이성경 분)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장면
MBC 캡처
추가합격으로 겨우 대학에 들어갔다. 더는 수학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가지고 있던 교과서와 문제집을 싹 다 버렸다. 대학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해도 되는 곳. 학문의 보고. 상아탑. 난 대학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입학식 날,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다. 난 사학과 신입생이었는데, 사학과에 대해 소개해 주는 사람도 무엇을 배우는지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다. 그저 술과 거친 농담만이 오고 간다.
"집에 가고 싶다. 학교가 싫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는 그저 누군가와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 반, 선배들이 실망스럽다는 생각 반이었다. 가벼운 선배들의 농담에 맞게 내 목소리와 행동도 가벼워진다. 썰렁한 농담에도 깔깔 웃어젖힌다. 깔깔 웃어젖히는 나는 그들의 행동에 부응하는 가면 쓴 나다. 과한 친절, 오가는 술, 재미없는 농담, 모르는 사람의 사생활 이야기로 공간이 가득 찬다. 무척 집에 가고 싶다. 격렬하게 집에 가고 싶다. 난 무언가 핑계를 대고 집으로 왔다. 학교가 싫다.
"사학과를 나오면 무슨 직업을 가질 수 있나요?" 내 질문에 교수는 박물관 관장이나 역사 교사, 역사학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직업군이 그것뿐이라니. 놀고 있는 선배들이 한심해 보였다.
학교에 닮고 싶은 사람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학교를 일주일 다닌 후 엄마에게 말했다.
"나 학교 그만둘래. 등록금은 아깝지만, 학원도 안 다닐 거니까 학원비에 썼다고 생각할래. 나 재수하면 정말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어."
엄마는 날 멍하게 봤다. 사실 나도 안다. 내가 그 과에 꼴찌로 붙었을 거란 걸.
엄마는 날 몇 번 더 설득했고 내 생각이 바뀌지 않자 화병이 났다. 화병의 원인인 나는 엄마를 위해 엄마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곰달래길 언덕을 넘어 목동도서관으로 간다.
목동도서관에서의 스무살, 나는 온전한 나로 존재했다
이어폰을 두 귀에 꽂고 쿵쿵대는 음악에 발맞춰 씩씩하게 걷는다.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가 되면 도서관이 보인다. 아침 일찍 학습실 문을 열면 대부분의 자리가 비어 있어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내가 하고 싶은 과목을 공부한다. 영어를 하다가 지겨우면 수학을 하고, 수학을 하다 지겨우면 국어를 한다. 이렇게 좋을 수가. 이젠 수학마저 재미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와 내가 스스로 하는 공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정오가 되면 도서관 근처에 있는 성당의 종이 울린다. 뎅~뎅~ 소리를 들으며 식당으로 간다. 식당에 가서 천 원에 파는 라면, 김밥, 우동 중 하나를 먹는다. 식사 후에는 도서관 앞 파리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자판기 커피도 마시다 1시가 되면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오전과 같은 패턴으로 공부하다 깜깜한 저녁, 집으로 간다. 고3 때 이렇게 공부했다면 참 좋았으련만. 한 달이 지난 후 엄마는 마음을 풀었다.
교과서를 다 버려 두 살 터울의 동생 교과서로 공부를 했다. 공부가 지루하면 동생 교과서 속 사진에 말풍선을 달아 낙서를 했다. 동생은 수업시간에 예상치 못한 낙서들을 발견하고 웃느라 잠이 확 달아났다고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더 재미있게 써 줄게." 난 내 잠도 깨고 동생의 잠도 깨우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동생의 교과서에 열심히 낙서를 했다.
스무 살, 난 항상 목동도서관에 있는 사람이었고, 날 보고 싶은 사람은 모두 목동도서관으로 왔다. 날 위해 누군가가 목동도서관으로 오면 그게 그렇게 좋았다. 여름이 되자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편입 공부를 하는 교회 언니, 대학에 갔지만 학사경고를 맞고 퇴학당해 다시 수능을 준비하는 교회 오빠, 종로학원(당시 제일 좋은 재수학원)에 다니지만 답답하다며 가끔 목동도서관에 오는 친구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더 힘이 났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도서관에 방문하는 사람도 더불어 많아졌다. 공무원 준비를 하는 선배, 자격증 공부하는 친구들도 함께 공부하자며 목동도서관으로 왔다.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 풍성해졌다. 별 것 아닌 이야기, 썰렁한 농담이 어찌나 웃긴지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어떤 날은 컵라면과 김밥을 사서 파리공원에 나가서 먹기도 했다. 그러면 꼭 소풍 온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가끔은 서로의 이야기가 과하게 풍성해져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 두 시간이 되기도 세 시간이 되기도 했다.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 우린 더 열심히 하자며 다짐을 하고 도서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루는 종로학원 수업을 땡땡이치고 목동도서관에 온 친구가 날 보고 말했다. "넌 참 밝은 노랑을 닮았어. 그 노란빛을 계속 잘 간직하면 좋겠다." 그땐 오글거린다며 그냥 웃으며 넘긴 말이 20년 넘게 기억 속에 남았다. 스무 살, 나는 온전한 나로 존재했다.
내가 받은 것을 잘 흘려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