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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 아이는 답이 아니라 공감을 원했을지 모른다

[학교의 아이들] 미용사를 꿈꾸던 J

등록 2020.02.21 17:58수정 2020.02.2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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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미용사를 꿈꾸고 있다. ⓒ Pixabay

  
"제가 미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카카오톡에 남겨진 글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며칠이 지나도록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들여다보면 답이 튀어나올 것처럼.

미용사를 꿈꾸는 아이

J는 지적장애 3급이었다.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줄 수 있는지 인터넷을 검색했다. 인터넷은 아이의 상태를 '지능지수와 사회 성숙 지수가 50 이상 70 이하인 사람으로 교육을 통한 사회적, 직업적 재활이 가능한 사람 및 다른 사람의 도움이 덜 필요한 사람'으로 규정짓고 있었다.

2019년 법정 최저임금은 8350원이다. 그러나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장애인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2017년 기준 약 3100원이었다. 기준 노동자와 견주어 생산력이 70% 이상이면 일반 노동자와 같은 최저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도 적혀 있었지만, 그 아이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냉정했다. 냉정하게 현실을 말해줄 수 있는지를 망설였다. 그 아이와 만난 지 6년의 세월이 지났다. 중간에 단 한 번의 만남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그것도 문자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용 기술을 배운다고 했다.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자격증 시험에서 여러 번 떨어졌다고 웃으며 말하는 아이에게, 망설임 없이 "꾸준히 하다 보면 잘 되겠지"라고 답했다.

내가 맡은 일반학급에 배정된 특수학급 학생은 2명이었다. J와 다른 한 명. '2017 특수교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같은 해 특수교육대상학생 수는 약 8만 9000명으로, 일반학생 수의 약 1.4% 정도다. 아이들을 만났을 때는 그보다 전이었으니 더 낮았을 것이다. 통합학급에 대한 개념이 막 정립되는 시기였다. 교육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이상을 얘기하지만, 현실은 팍팍하고 아이들은 고단했다. 준비 안 된 교실에는 준비 안 된 교사와 두 아이가 있었다. 아니, 두 아이와 나머지 31명이 있었고 그게 현실이었다.

일반학생들과 어울려 공부하게 한다는 본래 취지가 무색하게 J는 '분란의 당사자'였고 '진원지'였다. 매일 문제가 생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일 종례가 길어졌다. 문제라는 것이 대부분 J의 불만이었다. 자신을 흘끗흘끗 본다고 했다. 교실에 들어가면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자신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책상을 비스듬하게 돌리고, 책상 간격을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J는 참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란 생각은 없었다. 종이를 조각조각 찢어 사방에 흩어 놓았고, 속의 생각인지 누구에게 하는 얘기인지 모를 말들을 마구 했다.


교실은 금방 혼란스러워졌다. 쉬는 시간에는 대충 수습했고, 종례 시간에는 J가 특수학급으로 내려간 뒤라 다른 아이들과 남겨진 시간을 가졌다. 말은 도와달라고 했지만 간곡한 당부였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곁눈질하지 않기', '오해하지 않도록 눈을 마주치고 매일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말을 건네기', '수업 중 필요한 것 쓸 수 있도록 돕기' 등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고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종례 대부분은 J를 위해 학급 아이들을 붙들고 매달리는 시간이 되었다. 

그것이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비교적 빨리 찾았다. 책임을 아이들에게만 지울 수 없었다. 힘든 내색을 안 하는 아이도 조심스럽게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내가 끌어안자'였다. 그 아이의 엄마처럼 1년을 살아보자 생각했다. 작년 J의 담임을 맡은 선생님의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작년 담임은 아이에게 엄마라고 부르게 했다. 복도에서 만나면 "요즘은 엄마한테 안 오네. 서운하게"라고 말했다. 진짜 서운했는지는 모르겠다. 뒤에서 나누는 소리에 힘들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고 그 밖의 말도 들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았다. 내 자식에게도 부족한 엄마인데 J의 엄마를 자처할 수 없었다. 이름뿐인 엄마, 말만 앞세우는 부족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적어도 학교에서는 늘 옆에 있기로 했다. 필요한 순간에 옆에 있어 주기로.

똑똑! 문이 열렸다. 문 앞에 말도 없이 J가 서 있다. 표정이 곧 울 듯했다. 시험 기간이 아니고는 항상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해야 할 일은 넘쳤고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여러 가지를 챙겨야 했다. 아이로 인해 늘 뛰어다녔지만, 평소 하지 못하는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뛰어야 했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말할 기운도 없어질 것 같았다.

한 학급인 33명의 아이를 모두 신경 써야 했다. 아이들은 얘기를 안 하면 안 될 사안에만 번갈아서 나를 찾아왔다. 모두의 말을 차분히 들어 줄 겨를이 없었다. 이미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매일 벌어지는 불편함을 이야기하기에는 담임이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아이들이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각자 해결했다. 나에게는 통보해 줄 뿐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저런 사고가 있었다. 이렇게 해결되고 저렇게 마무리됐다고. 단 한 명 나의 역할을 정확히 알려주는 아이가 그 아이, J였다.
  
2층에서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중간쯤 올라가면 아이가 나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학급 교실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어디에 가느냐'고 물으면 "나한테 오는 길"이라고 답했다. '교실로 가야지 왜 이쪽으로 오냐'고 또 물으면 "같이 가려고 온다"고 했다. 그 후로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수업이 있든 없든 교무실을 나섰고 거기에 항상 그 아이가 있었다. 그렇게 매 수업 시간을 함께 했다. 교실에 데려다주고 내 수업을 하러 들어갔다. 끝나면 어느새 아이는 내가 나오는 교실 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특수학급 수업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J는 매시간 나와 동행했다. 늘 같은 질문을 했다.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썼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다음에는 수업 시간에 한 것들을 들고나왔다. 다행히 일찍 마음을 열고 난 후에는 가족들의 이야기도 했다. 언니와 오빠는 지체 장애가 없다고 했다. 언니가 자신을 많이 돌봐준다고 했다. 부모님은 자신 때문에 많이 다툰다고 했다. 아픈 사람의 가정은 모두 아팠다. 사람들이 건강을 제일로 여기는 이유도, 필연적으로 가정의 불화를 하나는 걷어내고 시작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J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J에게 듣는 말이 많아졌다. 힘든 과거를, 불편한 현재를, 불투명한 미래를 말하고 싶어 했다. 퇴근 시간 교무실을 나설 때까지 아이는 말이 이어지도록 무언가를 던져주길 항상 기다렸다. 학교에서의 일을 모두 털어버리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을 하며 교무실을 나서면, 아이는 복도 끝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짐짓 모른 체하며 무슨 일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면 조용히 따라왔다.

건물을 나서 주차장에 이를 때까지 손이 닿을 거리를 유지하며 말을 할 듯 말 듯 했다. 주차장 옆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항상 같은 말이었다. '이제 어디 갈 거냐'고 물으면 아이는 "집에 갈 거예요"라고 답한다. '집에 가서 뭐 하냐'고 물으면 "밥을 먹어야지요", '집에 누가 있냐'고 물으면 "언니가 곧 와요"라고 했다.

'오늘은 어떠했는지', '누가 불편하게 하는 일은 없었는지', '수업에 잘 참여했는지', '기분은 괜찮은지'를 물었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항상 먼저 가자고 했다. 집에 얼른 가서 쉬고 내일 보자는 말도 먼저 꺼냈다. 그때마다 아이는 순순히 따랐다. 할 말을 다 못하고 뒤돌아서는 느낌이었으나 애써 나는 그 느낌을 외면했다.
  
아이는 답이 아니라 공감을 원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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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는 나의 공감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입에서 꺼내는 것 자체가 문제 해결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아주 뒤늦게 했다. ⓒ Pixabay

 
딱 한 해를 함께했고 이후 6년 동안은 문자나 전화로 대화를 이어갔다. '잘 지내세요?'라는 문자를 시작으로 드문드문 생각날 때마다 문자를 해왔다. 아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알려왔다.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보고 싶다고도 했다. 거리가 멀었기에 학교를 끝나고 만나기는 내가 불편했다. 오기 힘들다고 오지 말라고 했다. 다음에 만나자는 상투적인 약속을 일 년에 한두 번 만남을 얘기할 때마다 입에 달았다. '스승의 날'이라고 불리는 날마다 아이는 이모티콘과 함께 '감사드린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스승의 날마다 보내는 문자를 보며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아이들과 마주하기 가장 싫은 순간은 바로 '스승의 날'이다. 가면을 쓰고 역할 놀이 하는 것만 같았다. 특별히 예민해서가 아니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부터 만나는 '스승'이라는 낯선 단어는 튀는 옷처럼 사방에 시선을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누군가 말했었다. '3월에 개학해 이제 2달을 함께 하는데 무슨 스승이고 무슨 은혜냐고, 그런 인사 싫고 나는 누군가의 스승 자격이 없다'고. 스승은 내 그릇에 담기에 너무 컸다.
   
문자를 받고 생각이 많아졌다. 답을 무어라고 해 주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넌 미용사가 될 수 있고 그것으로 자립도 하고 가족을 도울 수도 있어. 엄마 아빠의 기쁨이 될 거야' 등 많은 말들이 입에서 맴돌았다. 속 시원히 해줄 수 있는 말들이 없었다. 결국 답장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아이는 답을 요구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잠시 피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화두를 꺼냈으면 되었을 것이다. 살려달라고 하는 외침만 아니라면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었어야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난 좀 더 좋은 선생이 되었을까.

J는 학교에서 차별의 경험을 많이 얘기했지만, 문자로는 한 번도 차별의 경험을 말하지 않았다. 이미 그러한 말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를 배려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말의 깊이와 표현을 달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는 나의 공감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입에서 꺼내는 것 자체가 문제 해결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아주 뒤늦게 했다.
 
#학교의 아이들 #지적장애 #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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