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는 가족의 생계였고 어머니의 솜씨였다.
이복희
"엄마, 나 대학가도 돼?
"그…럼… 우린 뭐 먹고 산다냐…"
엄마의 커다란 눈은 소리 없이 방바닥으로 내려갔고 걸레질하던 손이 멈추었다. 짜증이 올라왔다. 내 나이 스물세 살, 힘들게 고민하다 한 말인데. 발악하듯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목울음이 먼저 차고 올라왔다. 엄마보다 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한숨도 감히 쉬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얀 모시를 싼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무명 저고리 한복에 허리 질끈 동여맨 엄마는 동구 밖 신작로로 나가면서 손사래를 쳤다.
"금방 올게. 어여 들어가."
서천 장까지 십리 길, 뙤약볕이 내리쬐기 전에 얼른 갔다 와야 하는 엄마의 분주한 발걸음을 주저하게 했다. 막무가내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할머니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다 넘어져 풀썩 주저앉아 억울하게 울었다. 내 몸과 내복은 흙을 먹어버렸다.
딸만 여섯을 낳고 두 딸을 홍역과 영양실조로 하늘로 보낸 엄마는 스스로 딸만 낳은 죄인으로 살았다. 시아버지의 허세로 가세는 기울고 그 아들은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방랑을 했단다. 덕분에 할머니와 엄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동네 품팔이를 해야 했고 엄마의 솜씨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엄마가 짠 모시는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모시를 팔아 생필품을 사기 위해 새벽길을 나서던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알사탕을 사 주머니에 넣고 오다 그날도 오징어 다리 파는 곳에서 한참을 머물다 오셨단다.
"너 임신했을 때 그 오징어 다리가 너무 먹고 싶었단다. 그러면 입덧이 사라질 것 같았지. 그런데 그걸 하나 못 사 먹고 왔단다. 내 입을 즐겁게 할 수가 없었어…"
첫 월급은 4만 5000원
중학생 때까지 몸이 약한 나는 새벽이면 자주 잠을 깼다. 체해서 잠을 못 이루면 엄마는 시아버지에게 배운 침으로 사관(四關, 손과 발) 자리에 침을 놓아 주곤 하셨다. 배를 따스하게 쓰다듬어 주면서 "내가 너 배 속에 있을 때 너무 못 먹어서 니가 이리 약한가벼"하며 천장을 바라보셨다.
모든 순간, 모든 일상을 책임지고 사시던 엄마는 누구 탓을 할 줄 모르셨다. 오직 자신이 바다인줄 착각하며 사는 사람 같았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고 3학년, 열아홉 살 뜨거운 8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언니 둘은 출가한 외인이 되었고 엄마는 쉴 틈 없이 남은 자식 먹여 살리려고 한산모시를 받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팔러 다니셨다.
입에 쓴 내가 나도록 발품을 팔다가 낯선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없어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했던 날들,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은 순간들도 많았단다. 그 뒤 엄마는 우리 집 대문을 스쳐 지나가는 행상들이나 걸인을 보면 툇마루에 앉혀놓고 물을 마시게 하거나 밥상을 차려주곤 하셨다.
초록이 조금씩 녹색으로 변해가는 여름날, 매미 울음소리처럼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스무 살, 녹음이 짙어갈 푸르른 날처럼 찬란해야 할 스무 살 여자아이 가슴에 빨간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견디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견디어 가고 있던 스무 살 나는 어느 날 파란 하늘을 보고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빨간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고개를 저으며 흐르는 것도 감추어야 했다. 왜냐하면 나름 예쁘고 싶었으니까.
하늘거리는 푸르른 스커트를 입고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바다로 떠나고 싶은 스무 살, 엄마 친정 옆집에 사는 지인의 도움으로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가장이라는 훈장이 달그락거리며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새겨졌다. 첫 월급은 4만 5000원, 이렇게 나는 스무 살 청춘으로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린 엄마에게 밥줄이 되었다.
철이 너무 빨리 들어 무거워진 머리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바람 잘 날 없다는 진리가 어느 날 천둥번개처럼 내 스무 살을 또 한 번 통째로 흔들었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집 한 채가 문제가 되었다. 뒷집에서 새집을 건축하면서 우리 집 뒷담이 그 집 땅이라 헐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법정투쟁이 시작되었다. 가난이란 쓰나미를 넘어 아버지의 부재와 아들 없는 모녀의 서러움은 조선 시대가 끝나고 세기가 바뀌어가도 변함이 없었다. 직장에서 조퇴하고 틈틈이 법원으로 시청으로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약속만으로 끝나는 게 부지기수였다. 겨우 만난 담당자는 확인한다.
"아버지나 오빠가 안 오고 왜 딸이?"
서류를 살펴보고 난 뒤 표정이 바뀐다. 그 뒤로 만날 수가 없었다. 다른 직원들이 속삭이듯이 들려주는 말은 "민사소송하면 오래 걸리고 더 어려워지니 잘 합의해보라"는 언질만 줄 뿐이었다. 뒷집은 법대로 한다고 난리고 시청 담당자는 번번이 바쁘다고 자리에 없었다. 한 직원이 사정이 딱해 보였는지 진지하게 듣더니 뒷집이 억지를 쓰는 것 같다며 담당 과장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시간을 잡아주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과장 사무실에서 뒷집 사람이 거들먹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되어도 문이 열리지 않더니 급한 볼일이 있다며 과장이 나갔다. 직원이 음료수를 내밀었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요"라며 고개를 숙인 채 자리로 갔다. 돈 없고 빽 없고 집안에 남자가 없으면 무시당해야 하는 걸까.
여름날 해만큼이나 내 가슴도 시뻘건 게 타들어 갔다. 뒷담은 헐리고 그 집은 새 건물로 지어지고 뒷집 처마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모든 빗물은 우리 집 차지가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밖으로 표현조차 할 수 없는 내향적인 성향으로 꼭꼭 숨어버렸다. 철이 너무 빨리 들어차 무거워진 머리는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아도 땅으로 떨어졌다.
늦었지만 지금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