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
을유문화사
제인 에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 치고 제인이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진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줄거리를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그를 한 번 떠난 적 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로맨스 소설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하지만 역시 과정이 궁금하다. 제인이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제인이 로체스터를 용서하고 돌아가는 과정. 과정이 제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줄 테니까.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엔 이 '과정'을 의심했다. 내가 과정에 설득될지도 의문이었다. 소설을 읽기 오래전부터 제인 에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고아라는 것과, 그가 그녀의 고용주라는 것, 그리고 제인이 로체스터를 선택하리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을 가로지르는 굵직한 줄거리에서 내가 느낀 건, 선택지의 부재였다. 제인 에어에겐 애초에 예시가 하나인 문제가 놓여 있던 건 아닐까. 마치 갓 눈을 뜬 아기 오리처럼 제 앞에 있는 이가 엄마라 착각하며 로체스터를 선택한 건 아닐까.
듣기로,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에게 버림받은 건, 그의 거짓말에 있었다. 유부남이 총각 행세했다지 않나. 아내를 둔 채로 제인과 결혼하려다가 딱 걸렸다지 않나. 성격 또한 괴팍하다지 않나. 그렇다면, 역시 각인 효과 때문에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를 사랑하게 된 것 아닐까.
아니면, 그녀는 그저 절망에 빠진 남자를 구원해주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릿적 여성상을 답습한 것뿐인 것 아닐까. 하지만 제인 에어가 이런 캐릭터일 리는 없었다. 이런 캐릭터가 이토록 오래, 특히 여성들에게 듬뿍 사랑을 받긴 어려울 테니까. 그래서 너무나도 유명한 이 소설을 읽기 전, 나는 궁금했다. 수많은 독자들처럼 나 역시 제인 에어를 좋아하게 될까.
소설을 읽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제인 에어>라는 소설을, 제인 에어라는 소설 속 인물을 좋아하게 됐다, 그것도 무지! 제인 에어에겐 왜 로체스터여야만 하는지 이해하게 됐고, 로체스터의 거짓말 또한 (제인 에어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용서하게 됐다.
사실 나는 제인이 로체스터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제인이 로체스터를 선택한다면 로체스터가 어떤 인간이든 둘의 사랑을 응원하게 될 게 뻔해' 하고 생각했는데, 어린 제인을 이미 신뢰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각인 효과 운운할 필요 없이, 제인은 작고 외로운 고아 소녀였을 때부터 결코 이 세상을 순진하게 바라보지 않는, 똑똑한 아이였다.
제인 에어는 이렇게 커왔다
제인 에어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외삼촌 댁에서 외톨이로 자란다. 외삼촌이 죽자 더는 제인 에어에게 관심을 주는 이도, 사랑을 주는 이도 없다. 제인 에어는 주로 이런 기분을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열등감, 굴욕감, 우울, 분노, 두려움. 외숙모 리드 부인은 제인에게 "내 마음에 들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입 다물고 있어라"라며 그녀의 내면을 훼손하려 했고, 어른들은 제인에게 "넌 명랑하고 쓸모 있는 아이가 되어야 해"라며 착한 아이가 될 것을 강요했다.
어린 제인은 사촌 삼 남매에겐 허용되는 무한한 사랑과 인정이 자신에겐 허용되는 않는다는 사실, 더부살이하는 소녀에겐 언제나 말과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는 사실에 화를 내면서 슬퍼한다. 그녀는 이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어렴풋이 깨달아가며 분노로 뜨거워졌다가 외로움으로 위축되길 반복한다.
어른들의 몰인정한 말을 들을 때면 용기를 잃고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약한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의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되길 강력히 거부한다. 명랑한 아이로 보이기 위해 억지로 웃거나 행복한 척하지 않는다. 대신, 본인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명확히 응시하며 울고 난 뒤에는 이렇게 말을 하는 아이다.
"너무 불행해서 운 거예요."
사랑받기 위해 순종하는 척하는 대신 울고 화내며 버럭버럭 대드는 제인. 그런 제인을 탐탁지 않아하는 어른들. 그래도 자신의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제인. 하지만 제인은 언젠가는 더 나은 방법으로 세상을 대면하고 싶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더 나은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며 미래를 희망하고, "내가 최선을 다해 맞추려고 하는데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도 그들을 싫어해야 해" 하고 말하는 이 당당하고 지혜로운 소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리드 부인 집을 떠나 로체스터를 만나기 전 8년 동안 로우드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제인 에어는 더 성장한다. 이제는 성숙한 여성이다. 더는 상처만 받던 어린아이가 아니다. 인정과 사랑을 충분히 경험했기에 자기 자신을 믿게 되었고, 이젠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서 충분히 자각하게도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본성'이 자신을 이끈다는 것, 여자에게도 "엄격한 속박이나 너무 지나친 정체는" 고통스럽기 마련이라는 것, "관습상 여자답다고 규정된 것을 넘어서서 더 배우고자 하고 더 일하고자 한다고 여자를 비난하거나 비웃는 것은 경솔한 짓"이라는 것도 안다.
열여덟 살 제인 에어는 로우드를 떠나 손필드로 향하며 더 넓은 세상, 더 풍부한 경험, 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꿈꾼다. 가정교사 제인 에어. 가정교사는 빅토리아 시대에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었다.
제인에겐 왜 로체스터여야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