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감기 >는 치사율 100%에 이르는 감기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국가 재난 사태가 선포되고 도시를 폐쇄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아이러브시네마
지금 코로나19는 그동안 이주노동자 혹은 결혼이주민을 관용으로 대하자던 한국 다문화 정책이 은폐해온 '날것의 인종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감염은 '나-우리'로서 자아를 변질시킬 수 있는 존재, 즉 숙주로서 타자에 대한 공포를 극적으로 폭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전염병을 둘러싼 정보의 부족으로 공포가 확산되고, 이때 그 사회의 약한 고리가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이다. 몇 년 전 메르스 사태 당시, 지금은 시대적 용어가 된 '여성혐오(misogyny)'가 우리 사회에 증폭됐던 것처럼 말이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을 때, 메르스 확산에 대한 불안의 징후가 여성 존재를 향한 조롱으로 전화(轉化)했다. 이 약한 고리들은 연결되어 있고, 혐오는 쉽게 전이(轉移)된다. 그럴수록 경계는 더욱 강박적으로 설정되고, 타자들은 계속 구성된다. 당시 여성을 향했던 혐오발화들은 특정 국가, 민족, 지역 등 더 많은 타자를 향해 확산되고 있다. 메르스 사태와 달리 우리가 잘 대응하고 있다고 확신할수록, 주변 '오염' 지역이 확대된다고 믿을수록 이 배제의 목소리는 커진다.
신자유주의 초국적 시대에 이미 전염병은 개별 국가 단위로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하선(下船)을 허락하지 않아 코로나19 확진자를 증가시킨 일본 크루즈선의 사례처럼, 일방적인 봉쇄가 초래하는 부정적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당장 동아시아를 벗어나면 한국인 역시 인종적 범주로 먼저 인식될 뿐이다. 네덜란드 국영항공사 KLM이 기내에 '승무원 전용 화장실'이라는 안내문을 한글로만 써 붙여 한국인 승객에 대한 인종차별로 논란이 되었듯이 말이다. 이렇듯 명료해 보이는 한국인 역시 어떤 지점에서든 타자로 지목된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
'닫힌 안전' 그러나 희망은 결국 타자로부터
그래서 다시 <감기>의 도입부를 떠올린다. 영화 속에서 변종 바이러스는 애초에 인간을 컨테이너에 감금하여 이동시킨 극한의 상황에서 창궐했다. 이는 지금도 역사적 이유로 내전이 발발하거나, 경제적 이유로 이민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세계를 반영한다. 당장 얼마 전 발생한 밀입국 냉동 컨테이너 집단사망 사건이나,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난민보트 전복사건 등 비극적 뉴스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그러나 현실과 달리 영화는 '닫힌 안전'이 아닌 '열린 희망'을 그려낸다. 천신만고 끝에 컨테이너에서 살아남은 단 한 사람, '몽싸이'라는 외부의 낯선 존재로부터 모두를 살리는 항체가 발견된다.
한국에도 제주도에 입도한 예멘난민처럼 국경을 넘어온 타자들이 있다. 한국 사회의 대응은 국제적으로 약속한 환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난민 남성이 자국 여성의 안전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즉각적인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우려는 메르스 당시 부쩍 시야에 들어온 중동 지역을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편견에 기반해 반여성적 공간으로 전형화시키는 흐름이 거셌다. 그리고 이는 때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약한 고리들은 엮여있을 때, 홀로 끊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