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초상화(글라크루아,1838.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다음 날, 마요르카의 중심 도시인 팔마에 도착했다. 문제는 숙소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당시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피난을 온 본토 사람들로 팔마는 이미 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여인숙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서야 '송 방'이라는 별장을 임대할 수 있었다. 날씨는 온화하고 하늘은 화창했다. 여기서 쇼팽은 팔마의 마주르카로 알려진 op.41-2, e단조 스케치를 완성한다.
별안간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로 폭우가 쏟아지고 강풍이 휘몰아쳤다. 병약한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상드는 팔마에서 내로라하는 의사 세 명을 불렀다. 진단명은 폐결핵. 의사 세 사람 모두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설상가상 의사들은 폐결핵 환자가 있다고 보건당국에 알렸고, 건물주는 노발대발하며 당장 집을 비우라고 난리를 쳤다. 게다가 건물주는 건물 내부와 정원의 소독 비용, 침대와 주방용품의 소각 비용. 새로 살 가구까지 엄청난 금액을 청구했다.
법률상 결핵은 법정 전염병으로 폐결핵 환자가 만진 모든 물건은 소각하도록 법이 정하고 있었으니, 건물주의 무리한 청구는 아닌 셈이다. 더구나 그때까지 결핵 환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결핵 청정 지역에 결핵 환자가 생겼으니, 이 공포는 혐오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발데모사에 있는 카르투하 수도원에 거처를 얻었다. 가구는 낡아 빠지고 먼지투성인 곳이지만, 상드의 표현에 의하면, '시인과 화가가 이제껏 꿈꾸어 온 모든 것을 자연은 이곳에 이루어 놓았다'라고 기록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상드를 향해 '바지 입은 늙은 말괄량이'라 손가락질했고, 상점들은 상드에게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팔았다.
상드는 멀리까지 가서라도 단백질이 풍부한 식료품들을 사날랐고 극진히 쇼팽을 간호했다. 밤이면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스페인에서 발간되는 신문 잡지에 원고를 연재했다. 화산 같은 에너지로 상드는 이 모든 일은 혼자 다 해냈다.
상드의 헌신적인 간호에 쇼팽은 차차 회복했다. 그리고 그동안 준비해 왔던 24개의 전주곡을 마침내 완성했으며, 폴로네이즈 제4번 op.40-2, 스케르초 3번 op.39, 마주르카 등 많은 곡을 이곳에서 만들었다. 특히 빗방울 전주곡의 탄생은 유명하다.
상드가 식료품을 사기 위해 시내를 나갔다가 폭우를 만났다. 둑이 무너지고 다리가 떠내려갔다. 상드가 탄 마차가 수렁에 빠지자 마부는 달아났고, 장장 12킬로를 6시간 걸어서 맨발이 피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상드가 집에 도착했을 때 쇼팽은 눈물을 흘리며 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상드를 본 쇼팽의 첫마디는 "죽은 줄 알았어. 죽은 줄……."
그날 밤 완성 시킨 작품의 주제가 설사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였을망정 그 빗물 소리는 그의 음악 세계에서는 그의 가슴을 향하여 하늘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방울이었나 봅니다.
쇼팽은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창조적 악상으로 승화해서 이 곡을 만들었다고 상드는 그의 저서에 기술했다.
마요르카 날씨는 악화하였고, 쇼팽의 몸도 다시 나빠졌다. 더는 그곳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상드는 짐을 챙겨 1839년 2월 13일 이 섬을 떠나는데, 이 과정이 눈물겹다. 쇼팽이 사용하는 모든 물건은 소각해야 했으므로 쇼팽은 다 부서진 침대를 배에 실었다. 설상가상 그 배는 돼지를 실어나르는 배였고. 결핵에 걸린 쇼팽은 사람들과 격리되어 지독한 냄새가 나는 돼지 우리 헛간에 감금되다시피 했다.
쇼팽은 기진맥진하여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았다. 쇼팽이 사경을 헤매는 사이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상드는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 군함 사령관에게 도움을 청했고, 유명작가인 상드의 간청은 받아들여졌다. 군의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긴 쇼팽은 마르세유에서 요양한다.
따뜻한 마르세유에서 쇼팽은 상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더욱더 깊어졌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의 천사 상드'라는 표현을 쓰면서 상드에 대한 소문은 사실과 다르고 그녀가 얼마나 인정 많고 자상한 여인인지 모른다는 편지를 보낸다.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물고 쇼팽의 건강이 나아지자 그들은 상드의 고향인 노앙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부터 상드와 헤어지기 전까지 약 9년 동안 쇼팽은 매해 파리(겨울)와 노앙(여름)을 오가며 생활했으며, 녹턴 G장조, 소나타2번 B플렛 단조, 발라드4번, 폴로네이즈 6번 영웅과 같은 수많은 명곡이 노앙에서 탄생했다.
쇼팽은 사람들에게 상드와의 관계가 연인보다는 예술적 동지로 알려지길 바랐다. 그래서 파리에서 각자의 아파트를 얻었다. 파리에는 그의 제자가 되길 희망하는 귀족 자녀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쇼팽은 레슨비와 출판비 등 수입이 적지 않았지만, 최고급 취향을 가진 탓에 지출이 많았다.
명품 옷과 명품 장갑, 좋은 마차, 또 건강상의 이유로 수족처럼 움직여줄 하인들이 필요했다. 이사 광인 쇼팽은 돈만 생기면 이사를 했고, 이렇게 느슨한 경제 관념 때문에 많은 수입에도 돈이 모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