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죠잔 지하호)의 입구
김지혁
1944년, 가을
대본영 방공호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어떻게 마쓰시로까지 연행된 것일까? 크게 5가지 경우로 나뉜다.
하나, 1944년 11월. 압록강 근처 공장 현장에서 연행된 사람들이다.
공사 총책임자 가토의 증언에 의하면, 압록강 부근에서 도박(화투)하던 이들을 끌고 왔다고 한다. 그 수는 무려 2000명에 이르렀다.
둘, 1945년 2월. 한국에서 연행된 사람들이다.
제 1연에서 노래하고 있는 내용이 이 케이스에 해당한다.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연행된 박도삼은 징용 영장을 가지고 온 마을 이장에 의해 집에 있다가 연행되었다. 연행된 사람 중에서는 밭에서 일하다가 잡혀 온 사람, 길 가다가 잡혀 온 사람 등 다양했다.
김창기, 강영한도 박도삼과 같은 케이스로 끌려온 징용자였다. 그들 증언에 의하면,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서 부산까지 온 뒤 도야마(일본)에서부터는 열차 화물칸에 실려 왔다고 한다. 열차 안에는 20와트 전구가 하나 있었고, 열차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긴 채 살벌한 감시 속에서 실려 왔다고 한다.
볼일(대소변)은 구석에 놓인 양동이에 했는데, 그 냄새가 심해 배급된 주먹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혹독한 추위에도 덮을 이불 한 장 없이 열차에 실려 와 처음 내린 곳이 마쓰시로였다.
셋, 1945년 2월, 도쿄의 시오도메 역을 경유해 온 화물 열차에 연행된 사람들이다.
연행 집행에 동행한 나가노시의 전직 첩보관에 의하면, 발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조선인들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넷, 1945년 2월, 아이치현에서 연행된 사람들이다.
과거 아이치현 징용과에서 근무하던 테라오 세이지에 의하면, 아이치현 고마키시의 일본군 공사 현장에서 조선인 300명을 트럭에 실어 데리고 왔다고 한다. 당시 도주를 시도한 이가 두 명 있었는데, 일본 헌병에게 사살되었다고 했다.
다섯, 1945년 4월, 시코쿠에서 연행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연행 경로는 불분명하다. 일각에서는 그들이 연행된 곳이 시코쿠가 아닌 나가노현 기소군일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이렇게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의 숙소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삼각 병사의 모양으로 높이는 사람이 키보다 낮았다. 연합군에 들키면 안 되었기에 숙소는 낮고 좁았다. 그리고 숙소 지붕은 흙이나 나뭇가지로 위장했다. 허술한 숙소는 비나 눈이 내리면 방수가 되지 않았고, 천장에서 물이 새 이불은 다 젖었다. 그 때문에 손과 발은 늘 동상에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