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이 연주했던 플례엘홀.(에두아르 르나르의 스캐치를 바탕으로 한 목판화, illustration 9.june.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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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는 자진해서 쇼팽의 연주회 평론을 쓰겠다고 자처했고, 실제로 쇼팽에게 매우 호의적인 기사를 썼다. 하지만 쇼팽은 리스트에게 이미 거리를 두고 있었다. 리스트가 요란하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방식, 또 언론플레이를 하며 탈베르크를 야비하게 공격하는 것이 싫었고, 결정적으로 리스트가 쇼팽의 빈 아파트에서 마리 플레옐과 밀애를 즐긴 일이 발생했다.
절친 리스트에게 등을 돌린 쇼팽
리스트는 동거 중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눈을 피해 쇼팽의 아파트를 이용한 것이다. 마리 프레옐은 쇼팽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카미유 플례옐의 부인이다. 그렇지않아도 결벽이 있는 쇼팽은 허락도 없이 자신의 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에 격노했다. 사람들은 위대한 리스트가 자처해서 쇼팽 연주회 기사를 써준다는 것이 큰 아량인 양 떠들었지만, 쇼팽은 이 또한 마땅치 않았다.
"지난 월요일 오후 8시, 플레이엘 살롱은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가장 우아한 귀부인, 가장 유명한 예술가, 가장 부유한 은행가, 가장 고상한 신사, 요컨대 돈과 재능과 아름다움을 다 갖춘 귀족 태생의 사교계 엘리트 전체가 이곳으로 몰리는 바람에 마차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중략) 그들이 얼마나 열성적이고 주의 깊은지 흡사 종교적 숭배라도 바치는 것 같다. (중략) 그는 단순히 재주가 뛰어난 비르투오소, 건반의 대가가 아니므로, 그는 단순히 이름난 예술가가 아니므로, 그날의 연주자는 그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쇼팽이었다!"- 리스트가 음악 전문지 '가제트 뮈지칼'에 쓴 평론.
공연이 끝날 무렵,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소절을 연주하고 있는 무대 위로 느닷없이 리스트가 올라갔다. 그리고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쇼팽을 무대 뒤로 데려갔다. 이는 무대 막바지에 쇼팽에게 쏠려야 할 관심을 리스트가 뺏어버린 격이 되었다. 쇼팽의 연주 기사로 도배 되어야 할 신문에는 리스트의 기행이 실렸다.
리스트의 이런 무례한 행동에는 리스트의 연인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이간질이 있었다. 마리와 리스트, 상드와 쇼팽은 마리가 운영하는 살롱에서 자주 만나며 절친했던 시절이 있었다. 리스트의 마음이 멀어져가는 것에 절망한 마리는 상드와 쇼팽 사이를 질투했고. 어리석게도 쇼팽과 상드를 비방함으로 리스트와의 단합(?)을 꾀했다. 마리는 쇼팽의 이 공연이 리스트의 명성에 도전하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고 리스트에게 속삭였고, 이에 리스트는 돌출 행동을 하게 이르렀다.
물론 순간적인 기분에 이런 행동을 했지만, 리스트는 이것이 쇼팽과 이별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당한 시기가 오면 그와 화해할 생각이었으나, 이를 계기로 쇼팽은 완전히 리스트에게 등을 돌린다. 이후에도 둘은 몇 번 마주할 기회가 있었지만, 쇼팽은 형식적으로 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쇼팽에게는 상드가 있었으니, 제 아무리 영향력 있는 리스트라 할지라도 쇼팽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음악계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진 리스트와의 결별은 훗날 상드와 헤어지고 인맥이 많지 않던 쇼팽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여하튼, 이 연주로 쇼팽은 큰돈을 벌었다. 6천 몇백 프랑의 수입을 올렸는데, 당시 1프랑은 현재 가치 1만~2만 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42년, 2월 21일 자작곡들을 모아 연주회를 열었는데, 새로 만든 발라드 3번이 이때 연주되었다. 비싼 입장료에도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이때도 쇼팽은 5천 프랑이 넘는 수입을 챙겼다.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릴 줄 알았지만, 일어설 만하면 주저앉고, 달릴 만하면 넘어지는 게 인생.
쇼팽은 연주회가 끝나고 심하게 앓았다. 연주에 집중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써 버렸기 때문이다. 편도선과 입에 문제가 생겨 보름 동안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미처 몸이 다 회복하기도 전에 절친이었던, 얀 마투친스키(Jan Matuszynski)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들은 쇼팽은 아픈 몸을 이끌고 달려갔다.
쇼팽의 극진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얀은 쇼팽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다. 설상가상 어린 시절 폴란드에서 그의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지브니의 사망 소식마저 들려왔다. 지브니는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는 날, 마을 어귀에서 쇼팽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칸타타를 지휘해준 스승이었다.
슬픔에 탈진한 쇼팽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앙으로 내려갔다. 쇼팽은 대부분의 시간에 곡을 만들었는데, 이때 만든 곡이 발라드 4번, 폴로네이즈 6번, 스케르초 4번이다. 쇼팽은 몸을 추스르고 상드와 함께 4개월 후 다시 파리로 올라온다.
파리 상드의 집은 개방 되어 있어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같은 역할을 했는데, 여기 단골인 시인 하이네는 쇼팽을 일컬어 "사람 됨됨이, 연주 스타일, 작품성의 세 가지 요소가 완벽히 균형을 이룬 음악가. 리스트 앞에서는 어느 피아니스트도 고개를 못 들지만, 쇼팽은 그렇지 않았다. 쇼팽이야말로 피아노의 라파엘로다"라고 극찬했다.
1844년 5월, 쇼팽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몸이 최악인 상태라 바르샤바로 달려가지 못하는 쇼팽은 식음을 전폐했다. 병세는 점점 나빠지고, 상드는 이런 쇼팽을 위로하기 위해 쇼팽과 각별히 사이가 좋은 누나 루드비카와 매형 요제프 칼라산티 예쳬예비츠를 파리로 초대했다.
7월 15일에 누나 부부가 파리에 도착했다. 누나 부부와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처럼 쇼팽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루드비카와 상드는 죽이 척척 맞았다. 누나 부부와 함께 노앙으로 내려온 쇼팽은 사랑하는 두 여인의 웃는 얼굴을 보며 행복했다. 상드는 이때가 둘 사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