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함께.
임희정
엄마에게
나의 조순덕 여사님. 나는 엄마의 이름이 순덕이라 좋은데, 엄마는 그 이름을 참 싫어했지.
세상에서 딸내미가 제일 중요한 우리 엄마. 내가 엄마를 오랫동안 창피해해서 많이 미안해. 어렸을 때 엄마가 제일 하고 싶어 했던 일은 내 손을 잡고 시장에 장을 보러 가는 일이었는데, 나는 그게 왜 이렇게 싫었을까? 내가 맨날 싫다고 싫다고 해도 엄마는 맨날 가자고 가자고 했지.
항상 양손 무겁게 식구들 먹일 장을 보고 낑낑대며 집에 돌아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따라가지 않았지. 사실 나는 그게 조금 창피해서 그랬나 봐. 자꾸 천 원만, 오백 원만 더 깎아달라고 하는 엄마의 말이, 조금 더 달라고 하는 엄마의 애원이 부끄러웠나 봐. 철없는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게 어딜 가나 가난을 티 내는 것만 같아서 엄마를 자꾸만 멀리했어.
지금도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시장에 가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지. 내가 엄마 앞에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면 그거 보는 것도 제일 좋아하고. 오랜만에 내 얼굴을 보면 엄마는 손을 하늘 끝까지 뻗어 올리고 나를 와락 껴안지. '아이고, 우리 딸!' 그 한 마디에 나는 맨날 눈물이 나. 엄마가 나를 안고 등을 토닥여 줄 때 나는 손으로 눈물을 재빨리 닦아.
맨날 나보고 불쌍하다고 했던 엄마. 나는 전혀 불쌍하지 않아. 누구보다 따뜻한 밥을 많이 먹고 자랐고, 누구보다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랐잖아. 그래서 나도 엄마가 불쌍하다 생각하지 않을래. 나도 엄마를 많이 사랑하니까.
엄마는 밥을 먹을 때 반찬을 손으로 잘 집어 먹잖아.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 얼굴에 잘 묻히고 먹고, 그 묻은 것도 손으로 맨날 슥슥 닦고. 엄마는 뭐든 손으로 하잖아. 음식 만들 때도, 음식 치울 때도 다 맨손으로 하지. 그 손으로 내 얼굴도 쓰다듬고 내 등도 쓰다듬어 주고.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 내가 좋아하는 음식, 다 잘 아는데, 나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엄마는 꿈이 뭐였는지, 뭘 좋아하는지, 어딜 가고 싶은지, 엄마는 항상 엄마보다 내가 먼저였으니까. 미안해. 내가 엄마보다 먼저가 되어서.
엄마는 나랑 목욕탕 가는 것도 좋아하지. 내가 등 밀어주는 것도 좋아하고. 생활비는 천 원 한 장 허투루 안 쓰면서 목욕탕 안에서는 나한테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고 맨날 말하지.
그러고 보니 엄마는 나랑 어딜 가는 걸 제일 좋아하는구나. 미안해. 같이 많이 못 가서. 엄마는 나밖에 없다고 속삭이듯 얘기하지. 미안해. 나는 엄마 말고도 다른 것도 많아서.
나는 언제까지 엄마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엄마는 언제까지 밥을 해야 할까. 밥, 밥, 밥... 엄마 많이 지겹지? 얼마나 지겨울까. 지겹다고 하면서도 엄마는 오늘도 차리지.
엄마, 다시 태어나면 머릿결 좋은 그 생머리 길게 길러서 찰랑거리며 다녀. 그랬으면 좋겠어. 염색도 하고 파마도 마음껏 하고. 미용실에서 무조건 제일 싸고 오래가는 거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 태어나면 또각또각 구두 신고 예쁜 옷 입고 다녀. 밥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사 먹어.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로 태어나고 싶지만 나 때문에 엄마가 희생하고 포기한 것들을 생각하면 나는 엄마가,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밥, 그게 뭐라고 엄만 평생을 차렸을까. 엄마는 때우고 나는 채워준 밥, 그게 뭐라고.
엄마, 우리 같이 밥 먹자. 이제 내가 엄마 먹고 싶은 거로 거하게 한 상 차려줄게. 고마워. 난 항상 엄마 덕분에 배불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