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재판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국가기록원
김재규를 비롯 '10ㆍ26거사'의 7인과 수천 명 광주시민들을 제물로 삼아 전두환 일당이 정권을 탈취하고 이른바 제5공화국을 세웠다.
그들이 내세운 기치가 이른바 '정의사회'였다. 그리고 '민주정의당'이라는 관제정당을 만들어 권력에 굶주린 정상배ㆍ어용학자ㆍ곡필언론인들을 끌어모았다.
이승만이 국민의 자유를 짓밟으면서 '자유당'을 만들고, 박정희가 민주공화제를 말살하면서 '민주공화당'을 만들었듯이, 전두환 일당은 민주와 정의를 유린하면서 '민주정의당'을 창당하였다. 그 후예들 역시 자신들의 정체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 당명을 내걸었다.
다시 역사의 반동기가 가속화되었다.
1980년 8월 16일 대통령 취규하가 사임하고, 11일만인 8월 27일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전두환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란 감투를 벗고, 박정희가 만든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서 단일 후보로 2,524표를 얻어 99.9%의 득표율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무리 '통대'의 선거라지만 99.9%의 당선율이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역시 유신의 유산이었다. 어느 족벌신문이 「인간 전두환」을 특집하면서 '아량과 청렴결백'을 홍보한 것도 99,9%에 영향을 끼쳤을 지 모른다.
전두환은 권력욕이 박정희에 못지 않았다. 최규하의 잔여 임기에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국가의 기본법이라는 헌법을 입맛대로 고쳤다. 여러 가지 구실을 붙였지만 주요 목표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방법이었다. 어용지식인들을 모아 개헌안을 만들었다. '통대' 대신 '선거인단'을 구성하여 대통령을 뽑는 제도였다.
5공헌법안은 국민투표에 붙혀져 95.5% 투표율과 91.6% 찬성율로 발표되었다. 유신시대처럼 정부의 '찬성계도'만 허용된 결과였다. 전두환은 만만한 야당후보 셋을 둘러리로 세워, 90.2%의 득표율로 7년 임기의 제12대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사가 걸작이다. '전쟁위협'과 '빈곤' 그리고 '정치적 탄압과 권력남용' 등 세 가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다짐했다.
이렇게 하여 '5공(五共)'이 출범하였다. 헌정사적으로는 다섯 번째 공화국이라 하여, 그렇게 불렸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이 20세기에 맞은(당한) 다섯 번째 공포의 '5공(五恐)'이었다.
일제강점→미군정→이승만독재→박정희독재→전두환독재로 이어지는 공포시대였다. 국민에게는 승냥이를 피하다가 늑대를 만난 격이 되었다.
반민주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무리가 '민주'와 '정의'라는 고귀한 용어까지 훼손하고, '기레기'들이 장단치는 세상에서 김재규장군의 유족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은 비좁았다. 구명활동에 나섰던 사람들도 된서리를 맞았다. 10ㆍ26거사는 결과론적으로 '늑대'들의 무대를 만들어 준 꼴이 되고 말았다. 역사의 반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