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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을 떠올리지 마시오

[어느 '중년 한남' 안치용의 페미니즘 이야기 13] 카렌, 리사, 플로이드

등록 2020.06.22 10:11수정 2020.11.1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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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접한 별개인 두 개 사건이 하나로 합쳐져 새롭고 고유한 하나의 의미를 생성할 때가 있다. 우연찮게 접한 별개인 두 개 사건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기존의 의미를 뚜렷하게 만들 때도 있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아마 후자에 해당하지 싶다. 리사 알렉산더와 카렌에 관한 이야기이다.

6월 14일(현지시간) AP에 따르면 미국의 중소기업이자 화장품회사인 라페이스스킨케어의 창립자이자 CEO인 리사 알렉산더는 9일 자신이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산책하며 행한 필리핀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언행을 사과했다. 사건은 오해에서 비롯했고 희극적인 면이 개입했지만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비무장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의 부촌인 퍼시픽하이츠를 산책하다가 고급 주택가 담벼락에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문구를 쓰고 있던 제임스 후아닐로를 경찰에 신고했다. 알렉산더 부부가 백인이었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를 쓴 후아닐로는 아시아인 남성이었다.

후아닐로가 SNS에 올린 동영상을 보면 리사가 제임스의 행위를 지적하며 논란이 시작된다. 리사의 논점은 사유재산에다 낙서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고, 제임스가 내 집 담벼락에 쓰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느냐고 응수하자 리사가 제임스의 말을 믿지 않고 급기야 경찰에 신고까지 한 것. 리사의 남편은 옆에서 몇 마디 거들면서 상황을 핸드폰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후아닐로가 공개한 동영상의 백미는 그가 낙서한 집이 자기 집이라고 밝혔지만, 리사가 그 말을 무시하며 집주인을 개인적으로 안다고 응답한 것. 그리고 실제로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차가 출동했다가 돌아갔다. 후아닐로는 SNS에서 "유색인종이 그렇게 비싼 집에서 살 거라고 믿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후아닐로와 알렉산더 부부 사이의 언쟁은 외관상 사유재산 침해에 관한 것으로 보였고 희극이 가미되었지만 사태의 본질은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라는 인종차별 항의 문구와 자기 집이라는 후아닐로의 말을 믿지 않은 인종차별적 태도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고, 그러하기에 동영상 공개 후 알렉산더 부부의 언행은 여론의 질타를 받았을 것이다.

알렉산더 부부는 후아닐로가 그 집을 18년째 소유하며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또 여론의 뭇매를 맞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한 언행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사건이 알려지면서 라페이스스킨케어는 일부 거래처와 계약이 끊겼고 리사의 남편 또한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됐다. "후아닐로를 만나 직접 사과하고 싶다. 그에게 왜 그런 무례한 질문을 했는지 정말 할 말이 없을 만큼 죄송하다"라면서 "인종차별에 무심하거나 천연덕스러운 것이 얼마나 큰 해를 끼치는 일인지 지난 48시간 동안 내 행동을 곱씹었다. 정말 사과드린다"는 리사의 사과문은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스스로를 구하는 데에는 실패한 셈이다.

나는 이 기사를 접하면서 뿌리 깊은 미국의 인종차별을 실감하면서 동시에 리사와 카렌이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사건 외양의 논쟁에 사유재산침해가 있었지만 이면에 인종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면, 리사의 배후에 카렌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웠음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법하다. 이제 카렌(Karen)을 만나보자.
 
 그려지는 여성
그려지는 여성픽사베이
"카렌이 누구인가? 카렌은 (매장에서) 매니저를 부르라고 하는 사람이다. 카렌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카렌은 장을 보느라 정신없는 사람이다. (당신이 달걀을 사지 못한다면 그것은 카렌의 잘못 때문이다.) 카렌은 백인이다. 카렌은 중년이다. 카렌은 교외에 거주한다. 카렌은 이성애자다. 카렌은 아이가 있다. 카렌은 층진 보브컷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이다. 카렌은 인종차별주의자다. 카렌은 섹시하지 않다. 카렌은 유기농 케일 샐러드를 먹는다. 카렌은 멍청하다. 카렌은 힐러리 클린턴이다. 카렌은 제스 필립스다. 카렌은 엘리자베스 워렌이다. 카렌은 당신이 카렌이라고 부르면 무척 화를 낸다. 카렌에는 언제나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사라 디툼(Sarah Ditum)이란 칼럼니스트가 영국의 인터넷신문 <언허드 UnHerd>의 4월 21일자에 "The sly sexism of the OK Karen meme"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카렌'을 정의한 글이다. 여기서 사용된 '밈(meme)'은 유행어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카렌이란 용어를 누가 만들어냈는지 모르겠지만 이 용어의 부정적 의도에 그대로 순응하여, 나는 리사와 카렌을 겹쳐서 보게 된다. 교양 있고 올바른 척 하지만 골수까지 차별주의가 차 있고 엉뚱한 발언과 비합리적 행동을 일삼는, 타인종에 대해 근거 없는 우월감에 사로잡힌 백인 여성. 상대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고 경찰에 신고까지 불사하는 '깬 시민'. 리사는 카렌의 전형으로 비춰진다.

카렌이 백인이기 때문에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아마 황인종 카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비논리적 주장이냐고? 칼럼니스트 디툼은 카렌이란 정의 자체가 비논리적이라고 주장한다. 당초 백인 여성의 특권의식을 조롱하는 데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일관된 원칙 없이 이것저것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짜증내는 행태를 벌이는 여성이면 거기에다 카렌을 갖다 붙인다는 것이 디툼의 설명이다. 지금은 우리가 카렌하면 당장 샌프란시스코의 리사를 떠올리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한국식 카렌으로 '김여사'를 떠올리게 될 수 있다.
 
"이 생명체는 가난하지도, 폭력을 경험하지도, 강간당하지도 않고(실제론 그렇지 않지만)…. 그녀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항상 아름다움을 느끼고, 유색인종 도우미에 불평하고, 팁을 짜게 주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어쩌면 이런 유형이 카렌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여성이면 카렌일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라사에게 후아닐로가 그저 가난한 흑인의 하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듯이, 여성혐오와 가부장제를 기본값으로 하는 이들에게 여성은 카렌이 될 수밖에 없다. 카렌은 특정한 유형의 여성을 희화화한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여성을 혐오한다는 뜻을 담은 용어이다.


카렌과 같은 용어와 용어사용의 문제점은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고착화하고 확대하는 한편 계급 인종 등 다른 사회문제를 성의 문제로 희석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리사의 문제는 리사의 문제이지 카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가 리사와 카렌을 연결 지으며 우려한 지점이다. 리사가 백인인 것이 (또는 후아닐로가 유색인종인 것이) 샌프란시스코 사건의 본질이지 리사가 백인 여성, 즉 카렌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어떤 독자는 생각지도 않은 카렌을 끌어들여 오히려 사건의 본질을 흐리느냐고 반박할 수 있겠다. 가능한 반박이다. 다만 카렌을 알든 모르든 어떤 이들은(주로 남성이겠지만) 머릿속에 고정적인 카렌을 심어두고 살고 있을 것 같아서 노파심에서 해본 얘기다. 아니면 다행이고. (하나마나 한 이야기겠지만) 어차피 한국 이름이 아니니 카렌이 한국에 입국하는 일 또한 없으면 정말 다행이겠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페미니즘 #중년한남 #안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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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미술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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