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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선수로 11년 살아온 제가 '최숙현의 절규'에 답합니다

하루라도 안 맞으면 불안했던 날들... 가해자만 책임져서는 끝나지 않는다

등록 2020.09.21 07:17수정 2020.09.2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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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간 농구선수 생활을 했다. 매일 먹고 자고 뛰었다. 지도자나 선배에게 맞고 욕먹는 것은 덤이었다. 하루라도 맞는 것을 거르면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겼다.

운동을 그만두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맞고 때리고, 욕하고 욕먹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경험한 현장이 조금이라도 개선되길 희망하며 연구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운동부 문화, 학생 선수의 교육과 인권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며 나와 같은 선수, 학생 선수들을 만났다. 농구공을 내려놓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위계적, 폭력적 일상이 당연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폭력은 곧 훈련, 비정상이 정상이 된 일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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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소속팀의 가혹행위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고 최숙현 선수의 마지막 문자 메시지. ⓒ PD수첩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고 최숙현 선수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다. 그는 지도자, 무면허 팀닥터, 일부 팀 선배에게 상습폭행, 폭언, 갑질을 당했다. 체중감량,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 경기력 향상 등이 이유였다.

최 선수는 대한체육회, 대한철인3종경기협회, 경북체육회, 경주경찰서, 경주시청 등에 자신의 선수 생명을 걸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결국 목숨을 던져 자신의 절규를 세상 밖으로 던져야만 했다.

신체적·정신적·성적 폭력, 입학비리, 인격모독, 차별대우 등 체육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건들이다. 마치 고이고이 간직해 대물림해야 할 문화유산처럼 끝없이 반복됐다. 체육계의 반복되는 비교육적, 반인권적 사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폐쇄적, 위계적 운동부 문화에서 비롯된 반인권적 훈련 문화이다. 밖에서는 심각한 문제 혹은 범죄 행위가 체육계 안에서는 경기력 향상, 선수 관리, 질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전부터 해왔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나 행하는 일반적 상황이기에 아무 문제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운동부 문화 안에서 훈련과 폭력의 경계를 나누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피해나 부당함을 밖으로 알리기가 쉽지 않다. 상명하복의 운동부 문화에서 지도자나 선배의 말은 어길 수 없는 법과 같다. 선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지도자의 비위를 알리기 위해서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단순 피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선수 생활, 국가대표 직위, 그리고 생명까지 내던져야 했던 선수들이 있다.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지만 책임은 오롯이 선수 개인의 몫이다.

또 구조 개선 없이 제 식구 감싸기와 꼬리 자르기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체육계에서 반복되는 반인권적 사건은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결과물이다.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지만 아무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수라서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몰아가거나, 괘씸죄를 적용해 내부고발자로 낙인을 찍는다. 사회 문제로 확장되기라도 하면 책임자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만으로 사건을 종결한다.

진작 바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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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희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 지난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브리핑룸에서 철인3종경기 선수 가혹행위 사건 특별조사 결과 및 스포츠 분야 인권보호 추진방안을 발표에 앞서 고 최숙현 선수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 ⓒ 문체부


무엇이 문제일까? 2019년 1월 문재인 대통령의 "체육계의 인권침해에 대한 근절책을 마련하라"는 지시에 따라 문체부 등 정부 기관과 민간 전문가가 참여한 스포츠혁신위원회(아래 혁신위)는 같은 해 8월, 7차에 걸친 권고를 통해 피해자 보호와 인권침해 대응시스템을 비롯해 학교체육 정상화와 엘리트 체육 개선 그리고 대한체육회 등 체육단체의 구조개편안을 제시했다. 별 내용은 없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맞지 않고, 성폭행 당하지 않고, 차별 당하지 아니하며, 누구나 건강한 방식으로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이러한 사태에 책임이 있는 대한체육회는 이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이를 무시하고 반대하고 이행하지 않았다. 일부 전문 체육인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내세워 혁신위 권고안을 '엘리트 체육 죽이기'라 주장했다. 상식적이며 보편적인 권고안의 내용이 왜 그들의 눈엔 비정상으로 비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운동선수 출신이자 체육과 교수인 내게 묻는다. 혁신위의 권고안 방식으로 현장이 바뀌어야겠냐고. 나는 망설임 없이 답한다. '진작 바꿨어야 했다'고.

종목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운동선수로서의 생명은 대부분 30세 안팎으로 매우 짧다. 운동할 날보다 하지 않고 살아갈 날이 더 길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운동선수들은 선수 이외의 삶은 없는 것처럼 하루를 살고 있다. 아니 운동 이외의 선택권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일상이란 매일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의미한다. 반복되는 것은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당연한 듯 반복되는 대한민국 운동선수들의 반인권적 일상이 정상이 되길 기대한다. 다시 고 최숙현 선수의 마지막 요청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우리 모두가 이 요청에 책임 있는 답을 해야 한다. 

☞ [그 코치 봐준 그 판결] 특별기획 바로가기 (http://omn.kr/1oz56)
덧붙이는 글 필자는 충북대 체육교육학과 교수입니다.
#스포츠 #최숙현 #폭력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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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학교 체육교육과에 근무하는 임용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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