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 김영랑 생가
정만진
영랑생가길 15(남성리 211-1번지)에 있는 옛집부터 찾아본다. 공식 이름이 '강진 영랑 생가'인 이 옛집은 국가민속문화재 제 25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인데,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등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변에 모란밭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공식 해설을 읽어본다.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큰 자취를 남긴 시인 영랑 김윤식(永郞 金允植, 1903-1950)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 본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변 밭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불탑이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재능과 지식을 갖춘 '영랑 김윤식의 생가'라는 역사문화적 가치와 함께 20세기 초반 건조물인 전통한옥과 근대 건조물의 이행기의 가옥으로서 문화변용의 한 형태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더불어, 영랑의 문학적 세계를 후손에게 길이 체감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 가치가 중요하다. 당초에는 전남강진 기념물 강진영랑생가(제89호)로 지정(1986. 2. 7.)되었으나 신청(2007. 5. 3)을 받아 국가민속문화재 제252호로 지정(2007.10.12)되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영랑은 서울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서 수학했다. '거쳐'와 '수학'은 졸업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일본 유학을 중도에 그만 둔 것은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강도 7.9의 관동대지진 때문이었다.
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자국 국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동경 체류 조선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조선인들이 지진을 기화로 우물에 독약을 넣고 주택에 불을 질러 일본인을 대량 살해하려 든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분노한 일본인들이 무기를 들고 돌아다니며 마구 조선인을 학살했다. 이때 최소 6661명에서 2만3058명의 조선인이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휘문고보를 중퇴한 것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때문이었다. 당시 3학년이었던 영랑은 서울에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후 구두에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고향으로 왔다. 하지만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6개월에 걸쳐 수형 생활을 했다.
생가, 3·1운동기념비, 금서당 터, 시문학파 기념관
영랑 생가에서 나와 정면으로 100m쯤 내려오면 군청이 있고, 그곳에서 서쪽으로 400m쯤 가면 탐진로 네거리(서성로 66)에 '강진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현지 안내판에는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시인 영랑 김윤식이 기미독립선언문을 구두창에 숨겨 와 사흘 뒤인 3월 4일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에 들켜 좌절됐다'라는 내용이 새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