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당시 육사생도 쿠데타지지 시가행진
자료사진
살벌한 공포 분위기
이 변란은 혁명이 아니라 군사반란이요, 쿠데타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때 나는 '혁명' '군사반란' '쿠데타'란 말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책가방을 들고 등교했다. 안국동 네거리를 지나는데 소총에 대검을 꽂은 군인들이 20~30미터 간격으로 대로변에 서 있었다.
어딘가 살벌한 공포 분위기였다. 그 며칠 후 아버지는 쿠데타의 주동자는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의장이 아니고, 사실상 실권자는 부의장인 박정희 소장이라고 귀띔했다.
바로 그분은 구미역 뒤 각산에 사는 신문사네 시동생이라고 하여 깜짝 놀랐다. 신문사네라고 하면, 고향 어른들이 늘 귀엣말하던, 우리 집 이웃에 살았던 박상희 선생의 부인을 말함이 아닌가.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 박정희 소장은 야전 점퍼 차림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시청 앞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쿠데타의 사실상 실권자로 당시 시민들은 작달막한 체구에 깡마르고, 선글라스로 얼굴 표정을 가린, 그 외모에서부터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고 한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입법·사법·행정의 전권을 장악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포고령을 마구 쏟아냈다. 그들은 구악을 일소한다며 구정치인을 연금시키고, 깡패들을 잡아들였다. 야간 통행금지도 저녁 8시부터로 연장하는 등, 날마다 일련의 강압 조치들이 줄줄이 쏟아냈다.
'눈물 젖은 빵'
그 무렵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혁명공약을 암송케 했다. 운동장 조회시간 전교생은 이 혁명공약을 낭독했고, 중간고사 사회 시험에도 출제돼 빈칸을 메우게 했다.
혁명공약에서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쿠데타 초기에는 시중의 미곡상에 쌀이 떨어지자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미처 동회에 주민등록이 안 된 우리 식구는 배급 양곡도 받을 수 없었다. 마침내 돈도, 쌀도 떨어져서 학교에 도시락을 싸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교실을 벗어나 수돗가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물로 배를 채웠다. 학급 친구들이 도시락을 다 먹었을 즈음, 다시 교실로 돌아오곤 했다. 이듬해에도 그런 날이 계속되자 당시 내 뒷자리의 별명이 '두꺼비'란 한의섭(현, 재미동포) 친구는 아침 등교 때면 내 책상 서랍에 빵 봉지를 넣어두었다. 거기에는 단팥빵이나 소보로(곰보)빵이 두어 개 들어있었다.
"얘, 아무 소리하지 말고 먹어."
그 빵은 나에게 '눈물 젖은 빵'이었다. 그렇게 그 빵이 맛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