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의 추억코로나로인한 노래방 폐업기사에 마음이 아프다.
황승희
노래방은 한반도를 점령했고 바야흐로 전 국민의 가수화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나의 직장 생활에서의 난관은 잦은 야근도 박봉도 아닌 늘 있는 회식이었다. 외로우셨나보다, 우리 부서장님은. 모든 부서원을 항상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노래방까지 끌고 다녔다. 나의 립싱크는 시즌2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대회 전날 그 목사님이 나에게 '괞찮으니까 맘껏 불러'라고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내 노래와 바꾼 그 트로피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전국에 노래방이 창궐하니 마치 밤이 돼야 비로소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들처럼 음치들이 하나둘씩 모이는 걸까. 음치클리닉이란 것이 생긴 것이었다. 구원받지 못한 형제들이여. 십자가 아닌 여기로 모일지어다. 그러나 위로도 희망도 한순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첫 수업, 선생님은 수강생 한 명씩 앞에 나와서 자기소개하고 노래 한 곡씩 하라는 게 아닌가. 태국에서 빙판길에 미끄러졌다는 얘기만큼 말이 안 됐다. 노래를 못해서 찾아온 건데 노래로 자기소개를 하라니. 전화 받는 척하며 나갔다. 나의 연기는 이제 김혜자도 울고 갈 지경이 됐다고 할까. 지하 주차장에서 수강료 환불을 구걸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떤 터널도 끝은 있는 법.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자발적 조기 은퇴를 실천했고 이제 조직 생활은 없으며 싫은 자리는 가지 않아도 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생각도 바뀌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괴로워했을까.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다. 나의 노래방 스트레스는 완전히 끝났다.
얼마 전부터 문득 그냥 노래가 하고 싶어졌다. 맺힌 응어리를 풀겠다는 것도 아니고 음치를 극복하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도 못 듣겠는 내 노래를 즐기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유튜브로 피아노를 독학하고 있다. 건반음과 내 노래는 지금도 서로 다른 산맥을 넘고 있지만 나는 흐뭇하다. 도전 자체에 뿌듯함이 있는 듯하다.
내 수준에 맞는 동요부터 근사한 연주곡까지 악보집을 만들었다. 동요계의 가요탑텐 '도깨비 나라'를 연주 한 날은 소고기를 기꺼이 먹었다. 악보 마지막 장 '캐논 연주곡'을 펼칠 날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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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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