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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독일 베를린을 관광한 적이 있다. 카이저 빌헬름 추모 교회 근처에서 신호 대기로 버스가 잠시 멈췄을 때 차창 밖으로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홈리스로 보이는 남자가 보도 한 가운데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들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곁에는 검은 개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신호가 바뀌어 버스가 움직이자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그 장면을 찍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내용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예술평론가 존 버거(John Berger)의 책 <풍경들(Landscapes)>에서 읽은 이야기다.
네덜란드 화가 룰란트 사베리(Roelandt Saberij 1576~1639)는 일상의 소소한 모습을 스케치했다. 1603년에서 1609년까지 그는 프라하를 여행하며 도시 뒷골목 풍경과 빈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삶에서 포착한(Taken From Life)'이라는 제목의 작품 80여 점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당시 화가들은 후원을 받기 위해 돈 많은 부르주아의 초상화나 이국적인 동식물 등을 그렸는데 사베리는 여행 중에 만난 홈리스를 주로 그렸으니 후원보다는 자신의 주관을 중시 했던 화가임이 분명하다.
▲ Seated Man, Roelandt Savery (Flemish 1576~1639) ⓒ Google Arts&Culture
어깨에 누더기를 두르고 길바닥에 앉아있는 홈리스의 모습은 400년 전에 그려진 스케치이지만 이질적이지 않다. 베를린을 여행하며 내가 본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라는 거리감도 없다. 사베리의 스케치는 400년 전 프라하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세계 어디를 가든 흔히 보게 되는 모습이다. 그의 스케치를 존 버거는 '현재 진행형'이라 명명했다.
나는 그날 베를린 길바닥에 앉아 있던 홈리스 남성을 종이에 옮겨 그렸다. 다 그린 뒤 오른쪽 아래에 날짜와 장소를 써넣었다. '2019년 5월 28일 베를린'. 베를린에는 부자도 살고 홈리스도 산다. 몇 백 년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나의 스케치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추모교회 근처 ⓒ 홍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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