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숙 세 번째 시집 <지금 이 순간>
안준철
나쁜 사랑은 가장 많이 존재하려는 사랑이고//나쁜 이별은 꽃 피고 지고 더 늦게까지 사랑한 후의 이별이다//좋은 사랑은 뭔지 모르고 하는 사랑//좋은 이별은 우연히 헤어져버린 순간이다//이별이 사랑의 꽃, 사랑은 삶의 꽃이다 - '사랑과 이별' 부분
내가 아는 이민숙은 무엇보다도 삶과 뜨겁게 연애하는 시인이다. 헌데 그녀의 연애 대상은?
아무나에게 양파는 나눠주는 엄마의 웃음보다 더 고혹적인/입 매무새를 본 적 없다 - '석류가 열리는 마당엔' 부분
절대 맛있지 말자/너랑 나랑/혀끝에 달라붙는 조미료/맛세포 뒤흔드는 설탕/귓가에 맴돌며 혼을 빼는 교언영색巧言令色/절대 웃지 말자/맛 하나도 없어 내팽개쳐진 민들레김치/뿌리, 쓰디쓴 이파리/저 거친 손 가난한 저 여자에게로 가자 - '맛없는 가난-김치 아리랑1' 부분
시인이 본 풍경은 일견 고혹이나 황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고혹적이지 않은 것에서 고혹적인 것을 볼 수 있는, 혹은 그것을 발굴해내는 능력이야말로 시인에게는 금과옥조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혀끝에 달라붙는 조미료"나 "맛 세포 뒤흔드는 설탕"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절대의 맛으로 소박소박 익어가는" 김치를 담그는 비법이자, 그녀의 시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첫사랑은 어땠을까? 이민숙이란 여자가 경험한 첫사랑 이야기가 궁금한 것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인 그녀가 표현하는 첫사랑의 언어들이다. 그녀는 김치 시리즈에 첫사랑을 이렇게 담았다.
도둑이 들었다/열여섯 젖무덤 같은 항아리에서/김치 딱 한 포기가 없어졌다/온몸 통째로 떨게 하는 첫 키스도/한 포기 김치처럼 도둑맞았을 뿐/아무도 모르는데 백주대낮, 들켜버린 듯/하늘이 뻥 뚫려 쏟아지는 듯/가슴이 무섭게 쿵꽝거린다/저 도둑아/어찌할 손/생김치 첫김치 가닥가닥 찢어놓고/(중략)/십리도 못 가고 발병 날 사랑아!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 '첫 사랑-김치 아리랑3' 부분
실제 도둑이 들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항아리에서/김치 한 포기가 없어"진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인 듯하다. 헌데, 김치 도둑이 이내 사랑 도둑이 되는 것은 순전히 그녀의 구석에서 나온 상상력의 힘일 터다. 그래도 그렇지 "생김치 첫 김치 가닥가닥 찢어놓고"라니? 중요한 것은 이런 육체적 사랑의 행위를 암시하는 '찢김'이 파괴나 해체를 넘어서는 생성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것이 하나의 통과의례가 되어 끝내는 둘이 하나가 되어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민숙은 개성이 강한 시인에 속한다. 모든 개성은 모름지기 구석에서 나올 터! 많은 구석을 가진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민숙 시인이 소유한 구석은 촘촘하고 은밀하지만 무언가를 숨기거나 배제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누군가와 소통하고 융합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와르르 무너질 용의가 있는, 타자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구석인 것이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밋밋한 보리식빵을 에스프레소에 찍는다//(중략)흰 화선지는 먹물 찍힌 붓에 얼핏설핏 순결이 무너지고//입술은 키스에 찍혀 사랑에 목숨 건다//천왕성 해왕성은 망원경에 찍혀 억겁 비밀도 부서지나//(중략)저 JSA야말로 평화주의자에 찍혔다 와르르//(중략) 찍힌다는 것,/모조리 와르르 해체되어 간다//(중략)//너 나 없이 우리 서로 몸의 살 풀어버리기//영혼이야말로 어찌 할 수 없는 허공!//첫날밤 밑 빠진 독, 얼빠진 사랑에 바람 붓기! - '찍는다' 부분
"밋밋한 보리식빵을 에스프레소에 찍"어 먹는 평범한 일상의 한 행위에서 "순결이 무너지고 사랑에 목숨을 거는 남녀 간의 사랑의 행위를 연상하는 것이 우선 재밌다. 이 또한 그녀의 구석 어딘가에서 나오는 시적 상상력임에 틀림이 없다. 헌데, 천왕성 해왕성과 JSA(공동경비구역)까지 등장하는 것은 좀 심상치가 않다.
물론 그럴만한 개연성은 있다. 그들도 무언가에 찍혔기 때문이다. 망원경에 찍히고 평화주의자에 찍혔다. 찍혀서 해체가 되고 와르르 무너진다. 그 결과 하나가 된다. 첫날밤의 사랑의 행위가 그런 것처럼.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가 하나가 되는 길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 찍고 찍히고, 그러다가 하나가 되는.
남도 여수에 거주지를 둔 시인에게 광주5.18과 제주4.3의 비극은 당연히 뜨거운 관심사다. 다만, 시인의 시선이 과거의 서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녀가 과거에 천착하는 이유는 오늘을 꽃피우기 위해서다. "우리 사랑 신새벽!"을 위해서다. "꽃이 꽃인 것은/저 대지의 용암에 꽃이 꽂혀 있는 탓이다//가장 뜨거운 곳에 뿌리내려 뜨거운 눈빛으로 건네주는/시간의 불"이라고 시인은 읊고 있다. 꽃이 시간의 불이라니!
한 번도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대는 어제라고 되돌아보지 않았다/
한 줄기 새파란 천둥번개/
거친 바위를 퉁탕거리는 계곡물이었다/
지금도 온몸이 뜨거운 능소화로 피어나는 정오/
물속에서 한목숨 풀어헤쳐버리는 물푸레나무/
난바다 펄떡거리는 상어 한 마리,/
수평선에 젖 물리는 돌고래 푸른 영혼이었다
- '카프페 디엠'
이민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에서도 암시하듯, 그녀가 주목하는 시간대는 지금 이순간(카르페 디엠)이다. 그녀의 시가 전반적으로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중과의 소통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 않지만, "난바다 펄떡거리는 상어 한 마리"를 포착하여 "수평선에 젖 물리는 돌고래 푸른 영혼"을 상상해내는 대단한 영력을 지닌 이민숙 시인의 다음 시집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다.
지금 이 순간
이민숙 (지은이),
고요아침,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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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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