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드라이기엄마는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가 버린 물건도 슬쩍 주워다 쓰는 일도 흔했다. 드라이기도 막내 동생이 버린 것을 주워다 테이프를 감아 쓰고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변영숙
동파된 온수관과 엄마의 드라이기
"이게 뭐야? 궁상맞게… 새로 하나 사지…."
"왜 이게 어때서? 바람만 잘 나오면 되지."
지난번 한파가 몰아쳤을 때 우리집 온수관이 얼어서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올 들어 두 번째였다. 지난번은 이틀 동안 집을 비운 사이 온수관이 얼어붙는 바람에 밤 12시까지 온수관을 녹이느라 애를 먹었다. 다행히 그때는 드라이어로 30분 정도 대충 보일러 쪽에 바람을 쐬어주니 온수가 나와서 큰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며칠 전 한파는 대대적인 예보와 안전 문자 폭탄, 그리고 직전의 동파 경험 때문에 단단히 준비했다. 그래 봐야 밤새 보일러 틀어 놓은 것이 전부였지만. 그리고 솔직히 새벽 늦게까지 온수를 사용해 4~5시간 동안 얼겠냐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아침에 물을 트니 또 온수가 안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 그 당황스러움은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른다. 다행히 찬 물은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일러를 틀어 놓는다고 온수관이 얼지 않는 것이 아니란다. 오히려 온수 쪽 수돗물을 약하게 흐를 정도로 틀어 놓으면 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보일러 배관을 빨리 녹여야 하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드라이기를 틀어놔도 소용이 없었다. 세 시간 넘게 언 보일러 배관과 사투를 벌였지만 물 한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보일러 업체의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보일러 고장 문의가 폭주하고 있으니, 온수관이 얼어서 온수가 안 나오는 경우라면 AS 센터가 아니라 가까운 보일러 수리업체에 문의하라'는 내용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상담원과 연결도 못 해 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한 시간을 녹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젠 내가 녹이고 있는 관이 온수관인지 직수관인지 난방관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출구 쪽을 녹여야 하는지 보일러 쪽을 녹여야 하는지도 자신이 없었다. 보일러 수리업체도 스팀기를 가져와서 녹이는 것 말고 특별한 방법은 없는 듯했고, 비용도 8~15만 원으로 저렴하지 않았다.
결국 늙은 엄마에게 SOS를 쳤다. 왜 무슨 일만 생기면 엄마를 찾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먼저 죽는소리로 하소연을 했다. 벌써 다섯 시간째라고. 춥고 허리도 아프다고. 그리고 동생의 드라이기가 내 것보다 바람도 뜨겁고 세니까 빌리러 가겠다고 했다. 집에 들어서니 엄마 얼굴은 벌써 걱정으로 가득했다.
"안 녹아?"
"안 녹아. 벌써 다섯 시간째야. 정말 꽁꽁 얼었나 봐."
"어쩌냐. 옷 따뜻하게 입고 해. 너까지 감기 들라."
"네…"
엄마는 안방에서 당신 드라이기를 들고나오더니 '이것도 가져가'라며 건넸다. 엄마가 내민 드라이기는 보기에도 시원찮아 보였다. 출력도 약했고 헤드 쪽에는 테이프까지 감겨 있었다. 늘 엄마가 사용하던 드라이기인데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었다.
"드라이어가 뭐 이래? 작동은 되는 거야? 이게 언제 적 건데 아직도 써?"
"그래 보여도 바람은 뜨거워."
"그러네. 근데 뭐 테이프까지 감아서 써? 비싸지도 않은데 하나 사지."
"그것도 내가 산 건 줄 아니? 막내가 멀쩡한 걸 버리길래 내가 가져다 쓰는 거지."
"괜히 가져가서 망가지는 거 아닐까? 망가져도 나 몰라."
"그래도 가져가 봐. 어서 가. 해 있을 때 녹여야 돼."
엄마는 내가 안쓰러워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다.
양손에 드라이기를 잡고 온수관을 녹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배수관을 감싸고 있던 보온재도 다 벗겨냈다. 쌍권총도 아니고 쌍 드라이기라니! 한 30분쯤 지났을까. 엄마의 드라이기에서 '팅~' 소리가 나더니 더 이상 바람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망가진 것이다. '내가 이래서 안 가져온다고 했잖아.'
이제 나머지 하나로 온수관 직수관 구별없이 뜨거운 바람을 열심히 쐬어주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온수관에서 똑똑똑 물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콸콸괄 쏟아졌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물이 나오니 반가워야 할텐데 허탈했다. 하루종일 수도관과 씨름하느라 기진맥진했다.
"엄마 녹았어. 이제 온수 나와. 근데 너무 피곤해."
"애썼네. 힘 들겠네. 쉬어라."
엄마도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나보다 엄마가 더 마음을 조였던 것 같다.
"엄마. 엄마 드라이기 고장 났어. 조금 틀었더니 금방 나가더라고. 출력이 너무 약한가 봐."
"그래? "
"내가 안 가져간다고 했잖아. 이제 내가 망가뜨렸으니까 내가 사 줘야 되잖아."
"안 사줘도 돼. 엄마 드라이기 잘 쓰지도 않아. 머리 짧아서 그냥 수건으로 몇 번 털면 금방 말라."
"엄마 농담이고, 이번에 새로 하나 사자. 내가 사 줄게."
"안 사도 된다니까."
"걱정 마, 2~3만 원이면 사.
"그래? 생각보다 안 비싸구나."
엄마는 당신이 괜히 고집 피워서 괜한 돈 쓰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드라이기가 엄청 비싼 줄 알았나 보다. 가격을 듣고 안심을 하는 듯한 엄마를 보니 마음이 짠했다.
물건 버리는 게 너무 아깝다는 엄마
"엄마는 없이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멀쩡한 거 버리는 것이 정말 아까워. 음식 버리는 건 죄 짓는 거 같고."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물건을 잘 버리지 못했다. 분명 우리가 버린 물건인데 어느 날 보면 엄마의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거나 싫증 나서 버린 옷을 엄마가 입고 있기도 했다.
'엄마나 써' 하고 드린, 샘플로 받은 화장솔은 10년도 넘게 쓰고 있다. 말라비틀어진 찬밥도 절대 버리는 법이 없다. 세상에서 밥 버리는 게 제일 아깝다며 끓여서라도 먹는다. 그런데 드라이기도 막내가 버린 것이었다니…
엄마도 참…. 드라이기를 주문하고 확인차 망가진 드라이기를 다시 켜 보았다. 앗. 윙~ 멀쩡하게 작동이 되는 게 아닌가. 망가진 게 아니고 과열로 잠깐 자동으로 전원이 차단된 모양이다.
드라이기 2개를 들고 엄마에게 갔다.
"엄마, 이거 안 망가졌나 봐. 다시 켜 보니까 되는데?"
"그래? 이거 바람이 얼마나 뜨거운데."
반색을 하면서 새것보다 헌 드라이기를 먼저 켜 본다.
"엄마 또 그거 쓰지 말고 새 거 써~."
"그래 알았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고놈 참 기특하네…' 하는 표정으로 옛 드라이어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엄마는 새것은 놔두고 이전 드라이기를 쓸 모양이다. 정말로 망가질 때까지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중에 엄마가 돌아가신 뒤 엄마의 유품 중에 이런 물건들이 많이 나오면 무척 슬플 것 같다는. 동생이 버린 테이프가 감긴 드라이기, 남동생이 입던 털조끼, 10년도 더 된 패딩, 샘플로 준 립 브러시, 아끼느라 미처 쓰지 못하고 쌓아두기만 한 물건들… 그런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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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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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관 녹이려다 망가진 낡은 드라이기, 이런 반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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