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컬 헬프 : 돌봄과 복지 제도의 근본적 전환> 표지
착한책가게
영국의 사회학자 힐러리 코텀은 책 <래디컬 헬프>에서 돌봄과 복지 제도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복지제도는 20세기 세계대전 이후에 고안된 것으로 21세기에 다양하게 맞딱드린 사회적 문제와 위험 앞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저자가 보기에 전후 사회의 디딤돌이자 실질적인 지지 체계였던 20세기 복지시스템은 거대한 '관리 당국'으로 변모했다. 시스템은 필요와 위기 수준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복지 대상자들을 관리할 뿐이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복지 급여와 서비스 체계도 복잡해진다. 한국에서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서비스의 종류는 360여 가지가 넘는다. 행정부처별로 나뉘어져 서로 통합되지 않는 데다 사회복지담당 공무원도 그 내용을 다 알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다.
큰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수고에 비해 안전망은 여전히 허술하다. 삶의 벼랑 끝에서 그 어떠한 사회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어간 이들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질 때마다, 복지 시스템을 손본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그다지 바뀌는 것은 없다.
저자는 질문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기존 서비스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곁에 서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로 바꾸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딪친 문제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근본에서부터 탐색해야 한다.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키워드는 '연결'이다. 개인, 가족, 지역 사회가 배우고 일하고 건강하게 서로 맞닿으며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러한 지원이 실질적으로 가능한 새로운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새로운 복지는 사람들의 의존성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삶의 어느 시점에서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럭저럭 잘살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방향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양쪽으로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를 관리만 하기보다는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사람 사이의 만남과 관계를 엮어갈 수 있도록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40쪽)
영국에서 '파티서플'이라는 단체를 만든 저자는 2006년부터 5개의 사회 실험을 디자인하면서 새로운 복지의 가능성을 연구해왔다. 폭력과 약물중독으로 위기에 놓인 가정, 일자리를 잃고 빈곤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 병원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노인 등과 함께 하며, 그들의 해체된 사회적 연결망을 재조직하고 스스로의 힘을 키워 자립해나가는 과정을 지원했다. '욕구를 관리하는 복지'에서 '역량을 강화하는 복지'로의 전환적 시도는 새로운 복지의 가능성을 창출했다.
예컨대, 위기 가정의 자립을 지원하는 '라이프 프로그램'은 가족이 스스로 미래의 비전과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왔다. 꿈을 설계하고 계획을 수립하고 역량을 기르는데 필요한 사람과 자원을 연결했다. 가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원 체계를 고안해냈다.
이 과정은 가족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권력을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복지 서비스 대상 자격을 평가하고 요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회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탐색하는 것으로부터 접근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복지 시스템의 운영 논리는 이런 식이다. 즉, 나를 평가하고, 나를 의뢰하고, 나를 관리하라. 이러한 시스템은 투입(구축 및 전문적 개입 시간)과 산출(위험 행동 감소)을 계산한다. 이 시스템에는 접근이 제한되며 소요 비용이 관리된다. 우리의 실험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제시했다. 우리 모두가 번성할 수 있도록 핵심 역량을 키워라. 필요하다면 우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 반드시 지원을 받도록 하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포함시켜라. 자유롭다는 느낌, 목적의식,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등의 측면에서 변화와 우리 삶의 질을 측정하라. 이것이 바로 래디컬 헬프,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히 새로운 돌봄체제이다. (257쪽)
'행복한 삶'을 위한 급진적인 대안
현대 복지 체계의 시작은 1942년 영국에서 발표된 '사회 보험과 관련 서비스'(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라는 보고서이다. '베버리지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 문건의 슬로건이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사회보장은 모든 국민에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표방했으며, 빈곤을 예방하기 위해 아동수당, 보편적 의료 서비스, 완전 고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래디컬 헬프>는 21세기의 달라진 정치 사회적 위기를 '베버리지 보고서'의 틀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현대의 빈곤은 돈에 관한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연결망의 해체, 관계와 공유해 온 경험의 단절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며 "관계의 결핍은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지금까지 누려온 풍성한 향유와 물질적 기회들에 영향을 준다"(66쪽)고 진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