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운동의 지도차 조철호조철호는 조선소년군을 조직하여 어린이들을 민족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조철호는 멋진 카이젤 수염으로도 유명했다.
중앙교우회
조철호(1890~1941)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난곡리(현 관악구 난곡동)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조선소년군을 창설하여 소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어린이들은 이미 3·1 만세운동에도 광범위하게 참여하였다. 진주를 비롯한 일부에서는 이때 이미 소년조직이 생겨났다. 이를 바탕으로 3·1 만세운동이후 노동자와 농민, 청년과 여성 등 각계각층의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대중조직도 다양하게 건설될 때 미래의 기둥인 소년들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자각에 기초한 소년운동도 활성화되고 각종 소년운동 조직도 생겨났다.
1921년 방정환의 천도교소년회와 색동회를 비롯하여 반도소년회와 불교소년회, 명진소년회, 1922년 조철호의 조선소년군 등 소년운동은 각계각층의 자각과 조직 활성화 흐름 속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조철호의 조선소년군에는 1928년 노량진에서 창설된 용흥소년군(대장 진태윤)도 61호대로 함께 했다. 용흥소년군은 설립 이래 매년 노량진 일대에서 어린이날 행사를 주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조철호와 동작지역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더 깊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철호는 1930년대 시흥군 북면 동작리에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조철호가 '동작리 자택'에서 상을 당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의 두 차례 '소식'란을 통해 확인된다.
<동아일보>의 1934년 6월 14일자와 1938년 2월 13일자 '소식'란은 조철호가 시흥군 북면 동작리의 자택에서 조외간상(遭外艱喪)과 조내간(遭內艱)을 당했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조외간은 부친상이나 조부상을, 조내간은 모친상이나 조모상을 말한다.
연이은 국외 탈출 실패와 3·1 만세운동
조철호는 1909년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일본에서 경술국치를 경험하면서 1913년 지청천 등과 함께 일본육사를 26기로 졸업하였고, 졸업 후에는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게 되었다. 경술국치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조철호는 일본에서 배운 군사기술을 제대로 써 먹기 위해 끊임없이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다고 한다.
조철호는 1917년 조선군 제20사단의 용산 부대에 배속된 것을 기회로 만주로 망명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는 국경을 넘지 못하고 신의주에서 붙잡혀 군법회의에서 자칫 총살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다행히 인연이 있는 일본인 고관의 비호로 죽음을 면하고 1년간의 감옥살이 후 제대 조치된다.
이후 조철호는 이승훈이 설립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군대의 교련 방식으로 훈련시키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만세운동 때에는 이승훈과 교장 조만식으로부터 독립선언의 계획을 통고받는 즉시 오산학교 체육교사로서 2월 하순경부터 오산학교 중학부 학생들에게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니 이 기회에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해야 하므로 오산학교 생도는 시기의 도래를 기다릴 것"을 알리며 준비했고, 정주의 3·1 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했다.
그는 3·1 만세운동을 벌인 직후인 3월 5일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하여 압록강을 넘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봉천성 하마당역에서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 또 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비슷한 시기 국외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독립군을 이끌고 맹활약한 일본육사 선배 김경천과 동기 지청천의 사례를 생각하면 조철호의 연이은 실패가 더 아쉽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조철호는 좌절하지 않았다. 출옥 후 이번에는 서울 중앙학교의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또다시 대한제국 군대의 교련방식에 따라 체육교련을 시키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일을 계속했던 것이다.
조철호, 소년운동에 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