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유세가 열린 서울 대학로에서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은 그 뒤에도 반세기 동안 '통일'을 짊어지고 다녔다. 백기완에게 통일이란 단순한 남북한의 통합, 그 이상이었다.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통일이었다.
"해방이라는 말이 있지. 우리말로 '날래'야. 다시 말해 해방이란 자유야. 사람의 자유, 목숨의 자유, 자연의 자유야. 이런 자유를 온 사회, 온 지구적으로 누리는 게 통일이야. 남쪽과 북쪽이 하나가 되는 것은 일 단계 통일이야. 있는 놈과 없는 놈이 하나가 되면 그건 진짜로는 분열이지. 돈이 우리를 억압하잖아. 돈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의 매개가 아니라 거꾸로 사람의 주인이 됐어. 우릴 억압하고 있어.
또 돈은 가만있으면 눈처럼 녹아버려. 끊임없이 굴러야 재생산이 되는 구조야. 그 욕구로부터도 해방이 되어야 통일을 할 수 있어. 절집에서 중들은 다 버리자고 하는데 자기 혼자만 버렸지 세상의 온갖 것을 버린 건 아냐. 자기 혼자만 버리지 말고 빼앗은 것도 내 거라는 거짓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야 그게 참통일이요, 살티(참목숨)의 통일이지.
통일이란 게 뭐야. 죽일 놈들 나쁜 놈들 이놈들 청산하는 것이 통일 아니겠어? 나는 민족통일이란 말은 안 쓰잖아. 민족적인 비극 속에 살았으면서도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 통일이라고 하잖아. 죽일 놈들을 청산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길이지. 통일은 분단 억압착취체제로부터 착취 받은 민중의 해방이야. 그것을 완결하는 게 한반도의 통일이고 전 세계로 완결하는 게 인류의 통일이야. 통일을 이렇게 봐야지."
결국 통일문제연구소 간판을 걸지 못하고 1967년 <사상계> 사장이었던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했다. 1968년에는 '다시 쳐들어온 일본,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 등을 다니면서 강연을 통해 대학생들을 일깨웠다
1969년 박정희는 삼선개헌을 추진했다. 그해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박정희 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음모인 삼선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첫 직장이었던 대한일보 객원 논설 위원직에서 쫓겨났다. 이때 삼선개헌반투쟁위원회 위원이었던 백기완은 박정희 고향인 경북 선산 장마당에까지 가서 정권을 몰아내자고 연설했다.
백기완은 이 연설로 박정희 군사정권으로부터 소송을 당해 10만원의 벌금형 판결을 받았다. 5년 뒤인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지인들이 모두 풀려날 때 군사정권은 이 벌금을 내야 한다면서 백기완만은 제외시켰지만 아내와, 박경리 소설가, 박한상 변호사가 대신 내서 풀려났다.
1970년 11월에는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 앞에서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분신했다. 봉제공장 노동자로 착취를 당하다가 독재정권 아래서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온몸으로 고발하며 산화한 것이다.
그 이전인 4월에는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가 터져 7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독재정권에 잘 보이려고 무리한 공사를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뇌물을 받아 부실공사를 눈감아준 것이 드러났다. 부정부패로 인한 인재였다. 3월에는 교통사고로 위장한 희대의 정치스캔들인 정인숙 피살사건이 터졌다.
이 세 개의 사건은 박정희 정권에서 금기어였다. 언론통제도 심했기에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백기완은 그해 생중계되는 TBC방송(동양방송)에 출연해서 "대망의 70년대라는 박정희의 구호는 거짓이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이 그것이라, 와르르 와우아파트 사건, 탕탕탕 정인숙 살인사건"이라고 박정희 정권을 정면 비판했다가 방송출연 금지를 당하고 쫓겨났다
1971년에는 <항일민족론> <항일민족시집>을 펴냈다. 4월 대선에서 박정희가 당선되자 백기완은 "돈과 폭력으로 거짓부린 뽑기(선거)이니 다시 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백기완은 장준하 선생과 함께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때 유신을 깨뜨리기 위한 취지문을 신발 깔창 밑에 감추고 찾아가서 읽어보라고 한 뒤 비밀리에 서명을 받았다. 함석헌,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안병무, 지학순, 백낙준, 김찬국, 계훈제 등 서른 명의 명단을 직접 모았다.
1973년 12월 24일에는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선언문을 낭독했고 이틀 뒤에 서명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항일민족문학의 밤'도 조직했다. 이 자리에는 장준하, 함석헌 선생을 비롯해 신경림, 염무웅, 이호철, 강민, 이문구, 박태순, 신기선, 김민기, 김영동 등과 일
반 시민도 많이 참석했다. 마이크를 잡았을 때 갑자기 전기 불이 꺼지자, 백기완은 이렇게 외쳤다.
"아마도 청와대도 불이 나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다 성냥과 손가락을 갖고 있지요? 손가락이 없으면 염통(심장)을 꺼냅시다. 거기다가 불을 대고선 청와대로 우리 불 밝히러 갑시다."
이 행사를 계기로 현재 한국작가회의의 태동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결성됐고 '민족문학의 밤'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문화운동은 독재에 저항하는 정치투쟁의 하나로 정착 돼갔고, 대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됐다. 독재정권의 악랄한 폭압 정치가 본격화됐다. 백기완은 이 조치를 비판하면서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박정희 유신 타도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제일 먼저 구속됐다. 함께 감옥에 갇혔지만 이때에도 장준하 선생은 백기완을 끔찍하게 아꼈다고 한다. 당시 수사 검사가 백기완에게 전해줬다는 장준하 선생의 말이다.
"백기완이 계속 때리면 나 조사 안 받겠다. 백기완이는 고집이 세서 맞아 죽을지언정 하던 일 절대로 안 분다. 그러니 그만 때려라. 왜냐, 백기완은 민족문화, 민중문화의 보고다. 그 사람 때려죽이면 우리 민중문화, 민족문화가 없어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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