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든한 살. 민중비나리
정택용
백기완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한겨울 가루눈이 지향없이 내리는 깊은 밤, 주린 속은 쓰리고 옛이야기는 달리고 화로의 불길마저 시들어가는 밤이면 울타리 너머 수수밭을 달리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스산했다. 이럴 때면 할머니는 백두산 준령을 넘나드는 독립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저 바람소리는 독립군의 말달리는 소리라고. 왜놈 병정을 쥐잡듯이하고 멧돼지 피로 허기를 달래고 산불에 의해 녹아내리는 얼음물로 목욕을 할 정도로 무쇠덩어리인 아, 신화 같은 우리 독립군. 이때 나도 이 다음에 크면 독립군이 될 거라며 웃통을 벗고 으쓱대면 그때서야 증조할머니는 옷을 화로불에 쬐여 목화마냥 하얗게 슨 이를 잡곤 하셨다"
-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서문 중에서
백기완은 구전동화로 널리 알려질 만한 옛이야기를 노래와 시, 그리고 거친 표현을 버무려서 구수하게 전한 천상의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그냥 전한 게 아니라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형식 그대로, 음정의 고저와 장단을 맞춰가면서 댓거리를 했다. 눈물을 흘리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호통을 치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눈에 힘을 주고 상대방을 노려보거나, 한동안 목을 추스르면서 침묵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 또한 수만 년 동안 이어져온 민중들의 이야기 형식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민중 사상의 원형이 녹아있었다.
"뿔로살이 이야기를 해줄게. 누렁소는 뿔로 산다, 이 말이야! 핏대로 산다, 그 말이지! 주인 놈은 낮잠만 자고 누렁소는 더워 죽겠는데 등짝을 때리면서 밭을 갈라고 하니까 코뚜레를 끊어버리고는 주인 놈을 받아버렸어. 그러니 배알이 쫙 나왔는데 그걸 뿔에 걸고는 자기가 가고 싶은 풀밭으로 간 거야.
거기가 진짜 자기 태어난 고장이거든.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먹고 잠을 자는데, 웬 놈이 와서 무쇠로 풀밭을 갈아엎어 버렸어. 그래서 그 무쇠를 먹어버렸어. 얼마 있다가 웬놈이 풀밭에 불을 질러서 그 불을 먹어버리니 어떻게 되었겠어. 어떻게 되긴. 아주마루(영원히)로 죽질 않는 천하의 힘꾼 뿔로살이가 된 거지."
백기완은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것"이라고 말한 문화혁명가이기도 했고, 탁월한 민중사상가이기도 했다. 만악의 근원인 사적소유와 독점을 넘어서는 '바랄'을 꿈꾸기도 했다.
"희망과 꿈이라는 말이 있지. 변증법적으로 하나로 만든 낱말이 있는데 그걸 '바랄'이라고 불러. 꿈을 꾸던 놈은 목숨을 걸고 노력하고 싸우지 않으면 죽어. 기운이 빠진 것은 그 바랄이 뭔지 몰라서 그래. 두 번째로 인류 문화, 땅별 지구가 망하는 건 돈이 주인이 돼서 그래.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돈의 똘마니가 됐잖아.
셋째는 땅별 어느 구석에 내 것 네 것 아닌 게 있나? 유식한 말로 사적소유지. 갈기갈기 찢어져서 내 것 네 것의 식민지가 됐어. 이걸 바로잡으려면, 책? 경전? 필요 없어. 싸움의 현장에서 이론적인 모순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싸움의 과정에서 사람의 인품이 모자라다는 것을 깨우쳐야 하는 거야.
일하는 사람들의 착한 바랄을 '다슬'이라고 해. 땀을 흘려보면 땀이 땅에 떨어지잖아. 그건 내 것이 아니야. 땅의 것이야. 한줌 거름이지, 내 것이 아니야. 두 번째로는 땀이 빚은 열매도 내 것이 아니야. 땀의 것이야. 땀은 한 줌 거름이고, 땀이 맺은 열매는 땀의 것이야. 자연의 것이지. 땀은 실체가 없잖아. 이걸 가지고 땀 흘린 사람의 것이라고 말하면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이야. 진짜 문화 혁명이 일어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