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선조가 빠져나간 궁궐이다
이정근
다행히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과 승군이 봉기,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고, 명군의 지원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임진왜란은 1598년 정유재란까지 7년여 동안 일본군이 조선을 짓밟고 수십만 명의 인명을 살상하였다. 전답은 황폐화되고 수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다.
그때 조선의 백성 중에 전란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허균의 경우도 누구 못지않았다. 임금조차 제 살길을 찾아 허겁지겁 도망치는 판에 관리나 백성들은 말 그대로 각자도생이었다. 허균이 겪은 참상을 직접 들어보자.
임진년(1592)에 왜적을 피해 달아날 때, 아내는 임신 중이라 고생이 극심했다. 단천에 도착해서 7월 7일 아들을 낳았다. 이틀 뒤에 왜적이 갑자기 이르러 순변사 이영은 마천령으로 물러나 진을 쳤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밤새 마천령을 넘어 임명역에 도착했다. 아내는 기진맥진해서 말 한마디 못할 지경이었다.
그때 같은 집안사람인 허형(許珩)이 우리를 맞이해 함께 섬으로 피했지만 머물 수 없었다. 간신히 삼정원의 백성 박논억의 집에 이르렀지만 10일 밤 아내는 운명하고 말았다. 소를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을 하는 내 아내의 몸이 여전히 따뜻해 차마 땅에 묻을 수 없었다.
얼마 뒤 왜적이 나루에 있는 관아 창고를 공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인께서 뒷산에 임시로 장사 지내라고 급히 명하셨다. 항년 22세. 그 중 8년을 나와 함께 살았다. 아아, 애통하다! 그때 낳은 아들은 젖을 먹지 못해 죽었다. 그에 앞서 낳은 딸은 장성해서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가 아들 딸 하나씩을 두었다. (주석 1)
허균은 늙은 어머니ㆍ어린 딸과 함께 먼 산길을 여러 날 걸어 어머니의 고향이고 자신이 태어난 강릉으로 돌아왔다. 귀소본능이랄까,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허균은 곧 강릉 교산에 있는 애일당에 피난처를 정하고 거기에 기거하였다. 애일당은 그의 외할아버지가 세운 바닷가에 있는 집이다. 이곳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그는 책읽기로 날을 보냈고 그의 외숙부가 세운 반곡서원과 별연사 같은 곳에서 노닐었다. 또 이 지방에 있는 산 이름을 따서 자기의 호를 교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 중에 왜적에게 직접으로 핍박이나 수모를 받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주석 2)
임진전란은 허균에게 학문적으로 인식했던 세상에서 현실의 눈을 뜨게 하였다. 고향 바닷가 바위에 얽힌 이름을 따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이무기의 교(蛟) 자를 호로 삼는다. 무능부패 타락한 왕조를 그대로 둬서는 안되겠다는 결의에 찬 '교산'이었을 것이다.
왜적에게는 무능하고 비겁한 조정과 관리들이 전란 통에서도 백성들을 등치고 할퀴는 일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허균은 「기견(記見)」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해는 지는데 늙은 아낙네가 황폐한 마을에서 통곡하네.
엉클어진 머리엔 서리가 내리고 두 눈동자는 흐릿하네.
사내는 빚 갚을 돈이 모자라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고
아들놈은 도위를 따라 청주 땅으로 향해 떠났다네.
집안은 난리를 겪느라고 기둥 서까래마저 다 불타버리고
자신은 숲 속에 숨느라고 베 잠방이마저 잃어버렸네.
살림도 썰렁하고 살 생각마저 없어졌는데,
관가 아전은 또 무슨 일로 이 집 대문을 두드리시나. (주석 3)
주석
1> 허균, 「아내」, 정길수, 앞의 책, 130~131쪽.
2> 이이화, 앞의 책, 66쪽.
3> 허경진, 앞의 책,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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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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