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중학교1909년 5월 22일 일본 고위층 자제를 위한 공립중학교로 문을 열었다. 학교 위치는 지금의 경희궁 자리다. 사진 속 경성중학교 건물 뒤로 경희궁 숭정전 지붕이 보인다. 경성중학교 건물은 해방 후 미군 항공부대가 사용했다. 미군 부대가 쓰던 건물을 넘겨받아 1946년 서울중고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1946년 2월 1일 김원규는 '서울중학교'로 이름이 바뀐 이 학교에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뛰어난 교사를 초빙하기 위해 그는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았다. '국보' 양주동(동국대 대학원장), 시인 조병화(인하대 부총장), 철학자 안병욱(숭실대 철학과 교수), 국어학자 남광우(인하대 교수), 소설가 황순원(경희대 교수), 조영식(경희대 총장), 이성삼(경희대 음대 학장), 서수준(경희대 음대 교수)이 서울교 교사로 재직했다.
심지어 미술 담당이었던 윤재우 선생은 서울고 교사로 오기 전에 조선대 교수였다. 대학교수를 고교 교사로 모셔온 것이다. 훗날 '신흥대학'을 인수한 조영식이 학교 이름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바꾼 것도 경희궁(慶熙宮) 자리에 있었던 서울고 재직이 계기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전통을 이어 출범한 신흥대학이 경희대로 이름을 바꾼 사연이다.
김원규 교장은 기라성 같은 인물을 선생으로 모시고, 학생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나왔다. 서울고 교정을 자기 집처럼 '티끌 하나 없이' 가꿨다. 서울고를 '한국의 이튼'으로 키우는 것이 김원규의 꿈이었다.
"워털루의 승전은 이튼스쿨의 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The battle of Waterloo was won on the playing-fields of Eton)
이튼 출신으로 나폴레옹을 격파한 웰링턴의 말이다. 김원규 교장은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이라 불린 아서 웰슬리(Arthur Wellesley)의 말을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곤 했다.
천하 준재의 요람을 꿈꾼 김원규
김원규의 호는 '해룡'(海龍)이다. '바다의 용'처럼 그는 이 나라, 아니 세계를 이끌 인재를 키우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가졌다. 11년에 걸친 그의 노력으로 서울고등학교는 한국을 이끄는 '천하 준재'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어디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隨處爲主)
김원규 교장이 학생에게 강조했다는 이 말은 지금도 학교의 슬로건으로 쓰인다. 그의 말은 '서울고의 정신'으로 회자되며 교정 곳곳에 새겨졌다. "우리의 기상, 우리의 사명, 우리의 이상"으로 끝을 맺는 서울고 교가도 김원규 교장이 직접 지었다.
김원규는 신생 학교인 서울고 학생들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그에게 배운 제자들은 그의 교육이 '스파르타식 교육'이었다고 회고한다. 한때 서울고는 '신문로 감옥소'라고 불렸다. 이런 말이 돌 정도였다.
"서대문에는 형무소가 둘이 있다. 하나는 영천에 있는 서울형무소(지금의 서대문형무소)이고, 또 하나는 경희궁터에 있는 서울중학교다."
1회 졸업생의 98%, 2회 졸업생의 96%가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김원규 교장 재임 시절 서울고는 서울대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신흥 명문이었다. "서울고의 본교가 서울대"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던 시기였다.
스파르타 전사처럼 자라난 서울고 인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