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 시절입원과 수술을 겪으며 한층 용감해진 아이를 보며 아이가 첫 걸음마를 떼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이는 성장의 마디마다 주어진 도전 과제를 넘기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키워가고 있다.
김현진
한 달 전 아이가 넘어져 팔꿈치 뼈에 금이 가 핀을 박는 수술을 받았다. 한 달간 캐스트로 고정한 채 지냈고, 핀 제거 수술만 남았다. 어린 아이는 수술 중 제어가 어려워 전신 마취를 한다. 마취를 위해 여러 검사를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병원과 의료진의 무신경함, 의료진 중심의 처우, 과도한 검사 요구 등으로 마음이 들끓었다.
이번엔 수술이 연기되는 불상사가 발생하면서 예상치 못한 검사와 진료가 더해졌고 중복해서 받은 검사도 있다. 그러면서 의료진에 대한 불신까지 생겼다. 간신히 모든 검사를 마쳤다. 이제 마지막 수술.
수술실로 들어간 아이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수술은 10분이면 끝난다고 했는데, 시곗바늘은 빠르게 움직여 30분을 넘긴다. 마취와 수술 준비로 길어진 걸까. 어쩔 수 없는 걱정과 의문이 마음을 휘젓는데 담당교수가 나타난다.
"잘 됐습니다. 깨끗하게 제거했습니다. 걱정마세요."
웃으며 말하는 교수 얼굴에 그동안 쌓였던 근심걱정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불만의 말은 금세 비워지고 감사함으로 가득 찬다.
이로써 싸움은 끝난다. 병원과 나 사이, 아니 외부로는 제대로 표출하지도 못한 채 내 안에서만 들끓었던 싸움이다. 해소할 길을 찾을 수 없어 더 답답했다. 하지만 아이의 치료가 무사히 끝났다는 사실에 모든 불만을 기꺼이 삭제하기로 한다. 어차피 이렇게 끝날 일이었다.
의사의 선의에 가득 찬 미소와 수술실 간호사의 세심한 배려에 마음의 고충은 눈 녹 듯 사라진다. 수액선을 잡을 때 울며 거부하는 아이에게 선생님들은 조근조근 설명해주면서 아이의 이해를 구했다. 처치 과정을 설명해 아이를 안심시키고, 끝나고 나서는 아이가 발휘한 용기를 놓치지 않고 칭찬해줬다. "어쩌다 다쳤어? 많이 아팠겠다." 진짜 관심이 담긴 말은 커다란 힘이 있다. 불신의 산을 무너뜨리고 분노의 강을 넘는다. 흔한 말 한마디에 담긴 무수한 공감이 내 마음까지 위로한다.
수술 전 무리한 검사를 요구하는 의사의 전화로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 얼굴도 모르는 의사에게 받은 상처가 눈 앞에 있는 한 명이 건네는 선명한 호의로 보상받는다.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타성에 젖어 자기 편의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걸, 가치를 지키며 성심껏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한 명이 주는 감동이 여럿이 남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놀라움을 경험한다.
위험한 치료는 끝났다. 회복까지의 과정이 남았지만, 큰 고비는 넘겼다. 잘 견뎌 내준 아이에게 고맙다. 아이 스스로가 지닌 본래의 긍정성이 그걸 해냈다. 두려움과 슬픔에 빠지지 않고 금세 즐거움과 명랑함을 회복하는 마음이. 아이의 마음에 기대어 우리는 걸어왔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수술 후 엑스레이 촬영실에 아이가 혼자 들어가는 걸 보니, 자신이 견딜 수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게 된 것 같다. 그새 아이는 더 용감해졌다.
우리가 헤쳐 나가겠다고 마음먹고, 힘을 모은다면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우리를 쓰러뜨리고 좌절하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다시 일어나고 앞으로 나가려는 걸 멈추게 할 순 없다. 그러니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믿는 일일 것이다. 해낼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가 힘의 근원이다. 아이에게도 그렇다. 잘 해낼 거라고 엄마가 믿어줄 때, 아이는 스스로 힘을 만든다.
우리는 식물처럼 자라는게 아닐까. 잡초는 콘크리트 바닥 틈새에서도 자란다.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고 나면 스스로가 자신을 키운다. 빛을 찾아 줄기의 방향을 바꾸고, 물을 찾아 뿌리를 뻗어낸다. 아이의 일생에서 지금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시점일 것이다. 그러니 양분이 충분한 토양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는 게 부모의 몫이다. 부모가 가진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 아이 자신이 지닌 마음의 힘을 느끼고 경험하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뿌리를 잘 내리고 나면 빛과 물을 찾아 키를 키우고 열매를 맺는 일은 스스로 해낼 것이다.
아이가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던 순간이 떠오른다. 걷다 넘어질까 두려워 하는 건 부모다. 엄마 손을 놓고 흔들거리며 발을 옮기는 아이에게 두려움은 없다. 자신이 걸을 수 있다는 즐거움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세상 속으로 가보고 싶다는 열망만 가득하다. 성장의 마디를 넘길 때마다 아이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고,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는 걸 스스로 깨우쳤다. 그 믿음이 스스로를 계속 자라게 한다.
회복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죽을 먹고 수술이 끝나면 먹으려고 남겨뒀던 체리를 먹는다. 선물로 받은 달콤한 초코파이까지 사이좋게 나눠 먹고 나니 배가 부르도록 행복감에 젖어 든다.
마음을 짓누르던 걱정은 사라지고 사방에 깃든 평온함에 온몸이 늘어진다. 포르르 떠올랐다 흩어지는 아이의 웃음 소리가 마음을 간지럽힌다. 우리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에 대한 보상은 순간 순간 아이가 보여주는 순수한 기쁨과 행복으로 충분하다. 소중한 무언가를 지켜낸 것 같은 뿌듯함을 안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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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앞 심란한 마음... 그사이 용기가 생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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