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살이의 몸통 반절만 잘라낸다. 신선함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홍보 방법이다.
서울애니멀세이브
하지만 수산시장은 다르다. 도살장을 드러낸다. 물살이에게 '도살'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는다. 애초에 생명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조 안의 물살이를 꺼내어 머리를 내려치고 칼로 아가미 부위를 내려친다. 한때 살아있었던 생명은 머리와 몸통으로 나뉘고 우리들은 그것을 '신선함'으로 받아들인다.
수산시장은 신선함을 과시한다. 투명한 수조 안에 물살이를 가득 넣어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한다. 바구니에 담아놓은 물살이가 팔딱팔딱 튀어 오르는 모습 역시 고통이 아니라 신선함으로 인식된다.
혹시 '물살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는가? 참 생소한 단어다. 동물권 활동을 하는 나조차도 한동안 이 단어가 익숙지 않아서 수중생물, 어류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물살이는 물고기의 대체어다. 물고기는 종차별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사는 강아지를 보며 개고기라 부르지 않는다.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를 보며 고양이고기라 부르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매일 먹는 소와 돼지와 닭도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수조 안에 있는 생명을 물고기라 부르는 걸까.
수조 뿐만 아니라 바다나 강에 사는 헤엄치는 생명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물고기'라 부른다. 태어나자마자 고기가 되는 운명일 뿐만 아니라 고기로 불리는 생명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물고기'라는 단어에는 생명성이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생명은 무시되고 고기로 인식된다. 태어나면서 음식으로 대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