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더화이와 김일성1955년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사진 오른쪽)과 건배를 하는 펑더화이(사진 왼쪽). 무정과 절친했던 펑더화이는 한국전쟁 때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으로 참전했다. 무정에게 텅치를 소개한 사람도 펑더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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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이 중국 혁명에 성공하자 중국인민해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의용군 부대는 북한으로 이동했다. 방호산이 지휘하는 중국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단 10,321명과 김창덕이 이끄는 제164사단 10,821명, 독립 15사단 14,000명의 병력이 북한으로 입국했다.
이들은 조선인민군 제6, 5, 12사단으로 각각 바뀌었다. 이들은 북한 병력의 1/3을 차지하면서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되었다. 이중 6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놀라운 기동력을 선보였다. 6사단의 기동과 전과가 미국 웨스트포인트 전쟁사 연구에서 자주 인용될 정도다.
입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6일 무정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에 포함되었다. 1945년 9월 11일 구성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도 무정은 서열 13위로 이름을 올렸다.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당 당시 무정은 31명의 주석단 중 서열 13위였다.
무정과 함께 귀국한 김영숙이 당이나 내각, 최고인민회의에서 활동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허정숙이 활발하게 활동했을 뿐 옌안에서 싸운 여성들이 북한에서 어떤 직책으로 활동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김영숙은 정치 일선에 뛰어든 남편 무정과 행보를 같이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정은 한때 '황해도의 아버지'로 불리며 해방 정국에서 명성을 떨치지만, 김일성과 만주파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정치가 아닌 군으로 활동 영역이 축소된다. 무정은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지만 정치력까지 겸비하진 않았던 걸로 보인다. 안문석 교수의 평가처럼, 무정은 '한국만의 공산주의'(communism for Korea only)를 꿈꿨지만, 자신의 꿈을 펼칠 공간은 마련하지 못했다.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출범식 때 무정은 포병 부사령관이었다. 인민군 총사령관은 최용건, 부사령관 겸 문화부사령관은 김일로, 모두 만주파였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남한 공격 계획을 작성할 때도 무정을 배제했다. 김일성은 유엔군 반격으로 압록강 일대까지 밀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무정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김일성은 왜 무정을 배제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