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이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권우성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폴란드 및 미국을 상대로 1승 1무를 기록한 한국 대표팀이 포르투갈과의 3차전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13일.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드는 축구 열기 와중에도 제3회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효순이·미선이 사건도 이날 발생했다.
이때 서울시장에 당선된 보수야당 후보가 이명박씨다. 서울시장이 된 그는 같은 해 12월 19일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을 상당히 치열하게 견제했다. 이명박의 움직임은 노무현이 당선되기 전부터 활발했다. 대선 전부터 그는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공약을 집중 공격했다.
대선 5일 전 발행된 2002년 12월 14일 치 <한겨레> 기사 "이명박 시장 '행정수도 이전 반대'"에 따르면, 이명박은 수도방위사령관이나 병무청장 같은 발언들을 하며 노무현의 공약을 비판했다. 그는 12월 13일 기자간담회에서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은 서울 지역의 안보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행정수도를 옮기면 수도방위사령부가 사실상 서울과 대전 두 군데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노무현 후보의 공약처럼 군복무 기간을 단축할 것이 아니라 기간을 늘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행정수도 특별법)'이 그해 12월 국회를 통과하고 뒤이어 2004년 4월 특별법 시행에 들어간 뒤에도, 이명박 서울시장의 공세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2004년 10월 18일 서울시 국정감사 때는 행정수도 반대운동을 애국운동으로 미화하기까지 했다. 그날 발행된 <오마이뉴스> 기사 "이명박 시장 '행정수도 이전 반대는 애국운동'"에 따르면, 이명박은 "행정수도 이전 반대는 나라를 사랑하는 일종의 애국운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박상돈 열린우리당 의원이 "서울시가 독립국가냐?"고 묻자 그는 "충분히 국민투표를 부칠 만한 사안"이라며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지론을 재차 강조했다.
이명박이 중앙정부에 홀로 맞선 건 아니었다. 한나라당이 차지한 서울시의회도 서울시청과 함께 반대운동에 동원됐다. 이로 인해 '관제 데모' 논란까지 일어났다.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이명박이 관제데모를 위해 서울시 예산을 유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대한민국의 문제인 동시에 서울시의 문제였다. 그래서 행정수도를 서울에서 충청으로 이전하겠다는 노무현의 공약은 누구보다도 이명박 서울시장의 격렬한 반발을 낳았다.
노무현에 대한 이명박의 도전은 부동산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노무현은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자 종합부동산보유세(종부세)를 도입한 반면, 이명박은 '뉴타운 사업'으로 대표되는 재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대통령의 핵심 정책과 관련해 서울시장이 정반대 행보를 보였던 것이다.
질긴 인연
이명박의 도전은 나름의 역사가 있는 도전이었다. 그 역사는 그가 전국구(비례대표) 초선 의원일 때인 1996년에 시작됐다. 이 해에 그는 제15대 총선에 출마해 초선 노무현과 맞붙었다. 이 시점부터 노무현이 서거한 2009년까지 이명박은 노무현과 깊고 깊은 연(緣)으로 얽혔다.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후보 및 통합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더불어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가 서울 종로구에서 격돌한 15대 총선은 이명박에게 특별히 강렬한 기억을 남긴 사건이다.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그가 이 일을 비중 있게 언급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야권 후보들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정계에서 잔뼈가 굵은 내로라하는 정치인들도 '정치 1번지' 종로 출마를 마다했다. 후보를 찾지 못한 당은 내게 종로 출마를 권했다. 정치 신인인 내가 종로에서 당선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이명박은 1992년 3월 총선에서 민주자유당(민자당) 전국구로 당선됐다. 그의 이름은 1991년부터 정치권에서 거론됐다. 그렇기 때문에 1996년 시점에는 딱히 정치 신인이라 말하기가 좀 애매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 표현을 사용했다. 거물급 보수 정치인들도 종로구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정치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이 막강한 야당 후보들을 상대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는 15대 총선에 관한 설명을 끝내는 대목에서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선거 결과는 예상 밖의 대승이었다. 나는 40.5%를 득표해 33%를 얻은 이종찬 후보, 17%를 얻은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무엇보다도 종로에서의 승리는 지역감정이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아니라 깨뜨릴 수 있는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새로운 정치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