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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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불효하는 자식이 되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있을까마는, 어쩌다 보니 불효녀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었지만 인생은 도통 내 맘대로 될 가망이 없어 보였던 우울한 시기였다. 나이에 버겁게 나름 무게감 있는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고 나니 외국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본다.
그런 시기에 한 남자를 만나 짧은 연애를 하고 결혼해 미국에 정착했다. 한국에서 별 볼 일 없는 내 신세가 미국에 왔다고 갑자기 달라질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순조롭게 두 아이를 낳고 남편과 오밀조밀 살림을 늘려가며 동네 마켓 갈 때 차려입어야 하는 스트레스도 없는 미국의 삶은, 먹을 만 하지만 간이 싱거운 김치 같았다고나 할까.
내 삶은 그렇게 비교적 순항했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부족함이 늘 날 갈망하게 했다. 그러나, 그런 허전함에도 큰딸에 대한 그리움에 밤마다 잠을 설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읽지는 못했었다.
그렇게 삼십 년을 훌쩍 넘겼다. 그 사이 부모님을 뵈러 한국을 몇 번 방문했고 얇은 지갑을 털어 미국행 비행기표를 사서 보내드리기도 했었다. 부모님이나 여동생을 만나러 서울의 친정 나들이를 했지만, 개인적으로 겪는 혼란과 감정의 오르내림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 웃고 떠드는 시간에 내 속안의 아픔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고 나 또한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었다.
어느 누구와도 나의 아픔을 나누지 못한 채 남편과 이십여 년 결혼 생활을 종결지은 후 시작된 싱글맘 생활로 나는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결혼 생활할 때도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싱글맘이 된 후에는 은행 잔고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압박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았다.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할 나이가 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먹고 마실 것이 냉장고에 넘쳐나도 내일 먹을 거리를 걱정하는 마음이랄까? 그렇게 나는, 실로 지난 삼십여 년 동안 내 걱정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란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내 걱정으로만 채웠던 지난날
부모로부터 삶을 부여받고 어느 정도 장성할 때까지 부모님의 그늘에서 먹고 자고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거나 혹은 싱글의 삶을 살기 위해 부모님을 떠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게 된다. 우리 삼 남매도 부모님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키워졌고 어른이 되어 각자 독립했다.
그런데 나의 경우 그 독립이라는 게 미국에 와서 가족을 꾸리고 직장을 얻어 생활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부모님을 뵙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아니면 뵙기조차 어려운 이역만리 땅에서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미국으로 이민 온 남편을 따라, 그리고 남동생은 유학 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얻으며 미국에 정착했다.
환갑이 채 안 되어 결혼식장에 큰딸을 데리고 입장하셨던 아버지는 환갑 나이 즈음에 당뇨를 진단 받으셨고 은퇴하실 때까지는 무난히 지내셨다. 하지만, 은퇴를 하시고 나서부터는 아버지의 암 진단, 어머니의 고관절 수술로 인한 투병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모든 병치레의 몫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막내 여동생의 것이었다. 언니와 오빠가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 보니, 막내 여동생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동생의 의지가 있어도 천성적으로 순하고 착하기만 한 제부의 성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딸보다도 아들보다도 더 자식 같은 둘째 사위의 넓은 마음에 비하면 나는 부모님의 안위를 제대로 걱정하지 않았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동생에게 부모님을 맡겨놓고 바쁜 직장일을 핑계로 친정 나들이도 가뭄에 콩 나듯이 했었고, 쉬는 주말이면 건강을 지킨다는 핑계로 들과 산으로 쏘다녔다.
진단을 받고 어렵게 결정했던 방광암 수술 경과가 좋아 아버지의 회복에 속도가 붙었다. 혈색도 좋으셨고 매번 갈아 끼워야 하는 요루백의 불편만 없다면 누가봐도 환자인 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록 건강해지셨다. 엄마의 고관절도 회복이 어느 정도 되자 부모님께 미국 여행을 권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두 분을 설득해 볕 좋고 바깥 온도가 가장 좋은 5월 초로 날을 잡았다.
오시기 전에 미리 잘 못 걸으시는 엄마를 위해 휠체어를 준비하고, 아버지의 요루백 처리를 위한 물품도 구입하고, 머무시는 한 달여 기간 동안 매 주말 여행을 위해 숙소를 예약했다.
꿈만 같았던 한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