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유성호
2017년 어느 여름날의 서울중앙지방법원,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법정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냉방장치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모두들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해댔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딱 한 사람만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었다.
처음 목격한 모습은 아니었다. 삼성 뇌물사건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다투던 재판이었다. 늦은 밤까지 검찰과 변호인단이 저마다의 논리와 증거를 내세우며 팽팽하게 맞선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때에도 늘 이재용 부회장의 등은 꼿꼿했다. 나는 그 가지런한 옆선을 지켜보며 '재벌 3세, 글로벌기업 삼성 후계자의 삶이란 저런 것일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남다른 이재용의 남다른 사건 : 삼성 게이트
'재벌 3세, 삼성의 차기 총수'는 사실 그가 피고인석에 앉은 이유였다. 삼성그룹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을 위해 청와대와 정부 부처를 움직여야 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이 부회장에게 그 대가로 '비선실세'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씨와 그의 딸을 도와달라고 했다. 경주마를 포함한 수십억 원이 오간 뒤, 제도가 바뀌고 정부의 의사결정 내용이 달라졌다.
감춰졌던 이야기들이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드러날수록 방향은 또렷해졌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평가대로.
박근혜 탄핵은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고리에 대한 탄핵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이유는 여럿이지만 그중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는 삼성 재벌과의 결탁이다. 삼성이 이건희에서 이재용으로 후계자를 물려주는 과정에 정부와 모종의 결탁이 필요하게 되자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최측근을 찾아내 로비를 시도한 것이다. 당시에 언론은 그 사건을 흔히 '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렀지만 나는 '삼성 게이트'라고 불러야 본질을 정확히 표현했다고 본다. - 김종인, <영원한 권력은 없다> 중에서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내게는 고작 4년인데, 누군가에겐 '벌써 4년'인 것일까. 게다가 이재용 부회장의 징역 2년 6개월이라는 죗값이 확정된 1월 25일부터 헤아리면 100일 조금 지났을 뿐이다. 내게는 고작 100일인데, 누군가에겐 '벌써 100일'인 것일까. 여기에 법대로 내는 상속세까지... 한국 사회 곳곳에서 넘쳐나는 삼성 걱정과 이재용 걱정을 보면 한숨을 쉬어야 할지 쓴웃음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치권에서도 삼성 걱정, 이재용 걱정은 끊이질 않는다.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4일 BBS라디오 '박경수의 아침저널' 인터뷰에서 "코로나 상황에서 경제가 매우 불안하고 반도체 위기를 온 국민이 극복하기 위해선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 필요성이 아주 강력히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출신인 같은 당 양향자 의원도 4월 2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전쟁터에 나간 우리 대표기업은 진두지휘할 리더 없이 싸우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그들은 세계적 기업을 여전히 국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작은 회사처럼 여기는 것 아닐까. 또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재용 부회장이 감옥에 가는 바람에 회사가 어떤 의사결정을 못한다면 정말 문제가 많은 회사"(채이배 전 민생당 의원)라고 말해왔다. '대기업이 경제를 선도하면 온 국민이 골고루 혜택을 누린다'는 낙수효과 역시 점점 옛날 얘기 취급 받는 시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예 "낙수효과는 한 번도 작동하지 않았다"고 선언해 버렸다.
위험한 세습사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