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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돌아왔다... 살았다

[홍정희의 세상살이] 44세 아빠와 4세 아들의 하루

등록 2021.05.23 19:42수정 2021.05.2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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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엉덩이가 들썩인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발견하며 그걸 빨리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라는 말을 달고 살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다. 사실은 슬플 일도, 기운 빠지는 일도 어퍼컷 날라오듯 난데없이 들이닥치지만, 동시에 또 시시한 일상에 헤헤거리기 일쑤다. 이런 하루도 저런 하루도 시시껄렁한 기록으로 남겨본다. 그러니까 어쨌든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므로.[편집자말]
우리 집엔 육아휴직 중인 44세 아빠와 가정보육 중인 4세 아들이 있다. 그리고 아내이자 엄마인 나는 주 5일 출근을 한다. 남편과 내가 공수 교대를 한 지 석 달이 되었다. 퇴근도 없는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는 고단함과 직장에서 파김치가 되어 퇴근해도 가만히 쉴 수 없는 고충을 서로 이해하게 되었다. 남편이 육아를 맡게 된 후 가장 달라진 점이라면 아이가 젤리와 초콜릿에 눈을 떴다는 것과 낮에 하도 뛰어놀아 저녁에 기절하듯 잠든다는 것이다. 음, 잘하고 있군.


서론이 길었다. 어쨌거나 이 글은 남편의 육아휴직기이다. 주인공은 남편이며 시점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정도가 되겠다. 그의 하루, 한 번 들여다보자.

두 남자의 하루

육아 휴직의 꽃은 가정 이발이라며 호기롭게 아내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실 한 달에 한 번 미용실에 가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아내가 아이의 머리를 잘라준 지 3년째 접어들었으니 웬만큼은 하겠지 싶은 믿음도 있었다. 그리고 망쳐봤자 누구 만날 사람도 없는데 뭐.

결과는 폭삭 망함. 처음엔 브로콜리로 만들어 놓더니 조금 더 다듬겠다고 다듬은 게 새송이버섯이었다. 그냥 12밀리로 싹 다 밀어달라고 아내에게 애원했지만 아내는 배를 잡고 거실 바닥을 뒹구느라 정신이 없다. 머리 사진을 찍어 초등 동창들 단체 채팅방에 올리니 'ㅋㅋㅋ'이 난무한다. 그래 아내와 친구들을 웃겼으니 됐지 뭐.

가정 이발의 산물로 획득하게 된 그의 새송이버섯 머리는 2주를 버티다 결국 미용실에 가서야 해결을 볼 수 있었다. 아내의 이모님이 위독하셔서 곧 장례식장에 갈 상황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새송이버섯을 머리에 이고 처가댁 일가친척들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이제 노장의, 백발이 성성한, 그래서 저게 지금 흰머린지 머리 밑 속살인지 구분이 안 가는 상태의, 그러니까 하여튼 퇴역 장교 같은 모습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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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출근하며 쪽지를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 홍정희

 
아내가 아침 일찍 출근하며 메모를 남겨 놓았다. 사실 아내에겐 약간의 심통이 올라오는 상태다. 그녀는 복직과 함께 활력을 찾았다. 생기가 돈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재밌게 지낸 하루를 미주알고주알 쏟아낸다. 다 좋다. 그녀가 돈을 버는 것도, 게다가 기분 좋게 돈을 버는 것도. 그런데 그 활력과 에너지를 그에게 쓰지 않음에 수시로 심통이 올라오는 것이다. 네 살 아들은 자주 그를 놀린다.


​"아빠는 갱년기, 헌이는 사춘기, 엄마는 정~상~~"​

아침에 일어나 이미 출근한 아내의 쪽지를 보니 기분이 째진다. 일희와 일비가 계단 하나 오르내리듯 쉽다. 오늘은 일희로 시작할 수 있다며 스스로 안도한다... 라고 느낌과 동시에 아들의 투정이 시작된다.

"눈곱 안 닦아요! 기저귀 안 갈아요! 헌이 아침 안 먹어요!" ​

​그는 갱년기인데... 아들은 미운 4살인데... 그렇게 둘의 하루는 시작된다. 일단 아내가 끓여놓은 된장국에 아침을 후루룩 먹는다. 밥상만 차려 놓으면 "헌이 배고파요"라며 입 벌리고 다가오는 아들과는 금세 애틋해진다. 밥 먹이며 그림책 읽어주는 스킬도 많이 늘었다. 그림책에 두루미가 나오는 장면에선 동물도감을 꺼내와 진짜 두루미 사진과 비교해 주는 섬세함도 발휘한다. 저녁에 아내가 퇴근하면 자랑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잘하고 있다고!"

아침을 먹고는 오전 산책을 나간다. 엘리베이터만 타면 "아빠 사진 찍어요"라며 폼 잡고 서는 아들 사진을 찍어 근무 중인 아내에게 충실히 보고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인형박물관 마당에 아이가 좋아하는 자전거며 붕붕카, 모래도 있다. 일단 거기에 풀어놓으면 시간은 금방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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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놀이터.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과 모래가 있는 곳으로 매일 나간다. ⓒ 홍정희

 
아니면 마트행이다. 그는 원래 마트 가기를 좋아했다. 구체적으로는 마트에서 과자 구경하기다. 그의 아내는 마트 가기를 좋아하지 않아 과자 쇼핑의 기회가 좀처럼 오기 힘든데 아들을 데리고 둘이 다니니 이런 건 참 좋다. 휴직하니 이런 소소함에서 일희를 느낀다.

점심시간이다. 예정대로라면 집에 가서 밥 먹고 아들이 낮잠 자면 옆에 누워 핸드폰이나 뚱땅거리며 재충전하는 시간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가 육아를 전담하게 된 시기부터 아들은 낮잠을 건너뛰거나 이동하는 차 안에서 20~30분 자고 일어나는 날이 많아졌다. 소중한 낮잠 시간이 망하면 다시 일비의 시간이 찾아온다.

빨래 바구니에 들어가 "더 높이, 더 세게"를 외치는 아들의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며 흔들어 주고, 붕붕카 타고 종횡무진할 때는 적당히 형식적인 추임새로 잘한다 잘한다 격려하며, 그러다 아빠 등에 올라타면 네 발로 이 방 저 방 순찰 갔다 오고, 음악 틀고 춤도 추다가, 간식 먹이고, 책 읽어주고, 짬 나면 빨래도 해놓다 보면 아내가 퇴근할 시간이다. 엄마 마중 나가자고 아들을 꼬셔 쓰레기 분리수거를 들고 나가면 아내와 딱 마주친다. 살았다.

발로 툭툭 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집에 온 아내가 아이와 함께 목욕하러 들어가면 이때가 유일한 혼자만의 시간이다. 꿀 같은 시간은 금세 지나가는 법. 저녁 먹고 아내와 가위바위보로 저녁 설거지 당번을 정하지만 8할은 그가 당첨이다. 어쩌면 저렇게 가위바위보를 못 할 수 있단 말인가. 낮은 싱크대에서 하루 세끼 설거지를 하다 보면 마지막 저녁 설거지 즈음엔 다시 일비가 올라온다. 나쁜 감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지 않아 아이를 재우고 아내랑 둘이 맥주라도 한잔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소등한다. 아이는 어둠 속에서 재잘거리다 이내 잠든다. 행여 아이가 깰라 조심스럽게 발로 툭툭 아내의 발을 친다. 벌써 잠든 아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왜! 왜!" 한다. 그래도 한 번 더 꼬셔보고자 아내 옆으로 가서 살짝 안아본다. 잠든 줄 알았던 아이가 "아빠, 아빠 자리로 가요" 한다. 그의 자리, 아내와 아들의 발밑, 그의 자리로 돌아가 눕는다.

일과 끝.
덧붙이는 글 상고를 나왔다. 이십 대에 돈 벌고, 삼십 대엔 대학생이었으며, 사십에 교사와 엄마가 되었다. 매일 제자들과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육아휴직 중인 44세 남편과 가정 보육 중인 4세 아들의 성장기가 뭉클해 수시로 호들갑을 떤다. 가까운 미래에 내가 졸업한 상고에 부임하여 후배이자 제자들과 그림책으로 수업하는 꿈을 꾸는 시골 교사 홍정희.
#남편육아휴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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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그리움을 얘기하는 국어 교사로,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로, 자연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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