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광주 항쟁 당시 전시 사진오월 광주 항쟁 당시 전시사진 조형물
하성환
초등학생조차도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했고 진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 광주에선 5‧18 항쟁 기간이 돌아오면 5‧18 하루를 휴업일로 하는 학교가 50%에 이른다. 교사-학생들이 추모행사에 참여하고 5‧18 운정동 국립묘지를 참배하기 때문이다.
절반에 이른 나머지 학교들은 다른 시도와 달리 학교에서 글쓰기, 주먹밥 행사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언젠가 전두환이 광주 법정에 출두할 때 근처 초등학교 학생들이 구호를 외친 것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5‧18은 초등학생을 포함해 모든 광주 시민들 영혼에 스며든 울림이자 삶의 정신적 기둥이다.
5월 26일 밤과 27일 새벽 광주항쟁의 마지막 보루인 전남도청엔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만 남았다. 도청 진압 직전 살고자 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자신의 의지대로 도청을 떠나거나 아니면 너무 나이가 어려서 강제로 내보내졌다.
시민군은 가두방송을 통해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고 애절하게 호소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그 처연한 방송 소리에 이불 속에서 숨죽이며 듣고 있던 광주 시민들은 시민군이 '폭도'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순간 함께 하지 못함을 이불 속에서 흐느꼈다.
80년 5월 광주가 잔혹하고 처참하게 진압당한 지 7년 뒤 6월 시민 항쟁이 전국을 강타했다. 그것은 그때 살아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이 저항의 불길로 용솟음친 탓이다. 군부독재의 불의에 맞서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게 했던 저항의 불길은 광주 항쟁 당시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 만들어 낸 절규였다.
그렇게 오월 광주는 6월 항쟁으로 오롯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다시 군부독재의 적폐세력인 박근혜 정권에 맞서 촛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2016-2017년 촛불항쟁, 그리고 2019 광화문과 서초동 촛불시위는 오월 광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역사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