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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게이인 줄 꿈에도 모를걸"... 우리는 늘 여기 있다

2021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 마무리... 차별금지법 제정을 기대하다

등록 2021.05.26 12:04수정 2021.05.2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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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광장으로 올라가자 색색들이 펄럭이는 깃발들이 보인다. 6색 무지개를 비롯해 다양한 색깔과 무늬로 구성된 깃발들에는 저마다의 문구가 적혀 있다.

"성소수자 우리 반에 있다.", "트젠(트렌스젠더) 여기 있다."
"인터섹스는 당신 옆에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가 퀴어라서 정말 좋다."


지난 5월 22일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이 진행된 신촌 유플렉스 광장에서 펼쳐진 풍경이다. 아쉽게도 당일 저녁에 깃발들이 철거되면서 그날의 풍경을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글과 사진, 영상으로 당시의 모습들을, 그리고 이를 통해 성소수자 운동이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를 나누고자 한다.
 

2021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IDAHOBIT) 공동행동 “우리가 여기 있다” ⓒ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는 목소리, 광장을 채우다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Biphobia, Interphobia and Transphobia, IDAHOBIT), 통칭 아이다호라 불리는 이날은 1990년 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것을 기념하여 제정된 날이다. 이날을 전후로 세계 각국에서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고, 다양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활동들이 진행되며, 한국에서도 시민인권단체들이 함께 아이다호 공동행동을 조직하여 몇 년 전부터 활동을 펼쳐왔다.

2021년 아이다호 공동행동은 신촌 광장에서 프라이드 플래그 전시와 릴레이 기자회견을 진행하기로 했다. 지난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확산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에도 광장에서 오프라인으로 행사를 하기로 한 것은, 나날이 거세지는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에 맞서 우리의 존재를 확실히 드러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2021년 초에 트랜스젠더 세 분이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났고,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반성 없이 4월 7일 보궐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퀴어특구'를 비롯하여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성소수자가 여기 있음을 알리고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일은 절실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릴레이 기자회견이라는 형식을 통해 공동행동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2021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 선포 기자회견
2021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 선포 기자회견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신촌이라는 장소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있어 여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2014년 제15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장소라는 점이다. 당시 보수개신교 단체를 비롯한 반성소수자 단체에서 도로를 점거하고 퍼레이드를 가로막았고, 4시간의 대치 끝에 밤늦게 행진이 진행되었던 바로 그 장소가 신촌이다.

다른 하나는 2020년 지하철 신촌역 역사에서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가 진행된 것이다. 당시 해당 광고가 게시 이틀 만에 증오범죄에 의해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지만, 이후 수많은 시민에 의해 광고가 다시 꾸며지고 재탄생했던 공간이 신촌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3박 4일 동안 신촌역 광고판을 지킨 이유 http://omn.kr/1os73)


따라서 2021년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을 맞아 신촌 유플렉스 광장에서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깃발들로 하늘을 수놓고 그 아래서 기자회견을 진행한 것은, 혐오와 차별 사건에 저항하며 힘차게 나아갔던 신촌에서의 역사를 이어나가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5월 22일 하루 신촌 거리를 성소수자들의, 퀴어들의 목소리로 채우는 공동행동을 진행했다.

프라이드 플래그가 수놓은 외침, 우리가 여기 있다
 
 2021년 5월 22일 신촌 유플렉스 광장에 걸린 프라이드 플래그들
2021년 5월 22일 신촌 유플렉스 광장에 걸린 프라이드 플래그들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저는 불모지 같은 한국에서 1956년생으로 태어나 나 혼자만 이 세상에 있는 줄을 알았어요. 그런데 1970년대에 선배들을 만난 후 용기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존재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가 여기 있다!" - 릴레이 기자회견 중 자유발언(윤김명우)
 
2021년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의 슬로건은 '우리가 여기 있다' 였다. 이 문구는 2018년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 당시 외쳐졌던 구호다. 인천 지역에서 최초로 개최된 퀴어문화축제 당시, 반성소수자 단체들의 조직적인 증오범죄, 집회방해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퍼레이드 행렬은 동인천역 굴다리 안에서 긴 시간을 대치해야 했다.


이때 누군가의 외침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나온 구호가 "우리가 여기 있다" 였다. 혐오와 차별에 맞서 성소수자가,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우리가 여기 있으며 결코 멈추지 않고 찬란히 빛날 것임을 드러내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2018년에 성소수자가 여기 있음이 축제에 모인 참가자들에 의해 외쳐졌다면, 2021년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에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프라이드 플래그 만국기와 문구들을 통해 이를 드러냈다.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젠더퀴어, 인터섹스, 에이섹슈얼, 팬섹슈얼, 에이젠더, 에이로맨틱, 폴리아모리, 립스틱레즈비언, 레즈비언 라브리스, 뉴트로이스, 데미로맨틱, 알렉시젠더, 폴리섹슈얼, 퀴어피플오브컬러 등 당시 광장에 펼쳐진 총 19종의 깃발이 각 상징하는 정체성이다.

언뜻 보기엔 복잡해 보이지만, 다양한 정체성의 언어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다양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이 있음을, 그리고 소위 정상으로 여겨지는 이성애, 이분법적 성별의 언어가 한계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다.
  
"논바x에이스(펙트럼) 나야 나."
"양성애자 납시오."
"뉴트로이스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어요."
"내 사랑에 성별은 없다!"
"2022년 지방선거 준비하는 퀴어도 있다."
"야생의 논바이너리 등장!"
"너희, 내가 게이인 줄은 꿈에도 모를걸!"
"레즈비언 여기 있다."


각 깃발에 남긴 저마다의 문구는 그 자체로 혐오와 차별이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존재들이 여기 있음을, 광장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이는 우리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비록 22일 저녁 깃발들은 내려갔지만, 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여러 성소수자가 지금도 우리 곁에 함께 있다는 점을 모두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성소수자 운동의 에너지,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이어나가자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프라이드 플래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프라이드 플래그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당일 프라이드 플래그에 적힌 문구 중 가장 많이 보였다.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에 맞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차별금지법을 통해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에 대한 실효성 있는 구제책을 마련하고, 혐오와 편견을 없애기 위한 교육과 캠페인 등을 실시하며, 무엇보다 국가가 차별에 가만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날 광장에 모인 이들이 한마음으로 바랐던 소망이다.

지난 21일 한국갤럽에서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직장 동료가 동성애자임이 밝혀져 해고된다면 타당한 조치라고 보는지에 대한 질문에 81%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타당하다'는 답변은 12%에 그쳤고, 7%는 의견을 유보했다.

정치권은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성소수자와 관련한 논란이 있어 어렵다는 핑계를 대지만, 시민들은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이유로 고용, 교육, 재화용역 등에 있어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데 분명한 합의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하루빨리 정치권이 자신들의 책무를 다하여, 이러한 시민들의 목소리에 응답할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이러한 시민들의 힘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이루어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지난 24일부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bit.ly/equality100000)이 진행 중이다. 시작한 지 3일 만에 4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와 응원을 보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도 청원의 참여와 공유를 부탁한다.

2021년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은 이렇게 마무리됐지만,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며 존재를 드러내는 성소수자 운동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이 힘이 제도적인 성과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2022년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에는 차별금지법이 있는 대한민국에서 다양한 성소수자들이 우리가 여기 있음을 외칠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입니다.
#성소수자 #차별금지법 #아이다호 #IDAHO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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