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인플루엔셜
뜻하지 않게 손에 들어와 읽은 후에도 계속해서 손에 만지작거리게 되는 책이 있다.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매트헤이그 지음)가 그것이다. 나는 온라인 독서모임을 통해 이 책을 추천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을 읽기 위해 그 모임에 참여했다기보다는 그 모임에 참여하는 바람에 이 책을 읽게 된 셈이다.
전혀 계획에 없던 물건을 샀는데 그 물건이 매우 마음에 드는 경우, 우리는 그 물건에 대한 만족감보다도 무계획 상태나 우연의 상황에서 내린 자신의 선택을 더 높이 사기도 한다. 내가 지금 그렇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사실 이 책 때문인데,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 책이 나로 하여금 선택이 불러오는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들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 자체가 내게 특별한 갈림길 하나를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한 여성(노라 시드)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후 '자정의 도서관'을 통해 삶을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엔 특별히 양자물리학의 평행우주 개념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내가 꼽는 가장 흥미로운 포인트이기도 하다. 양자물리학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가 어떻게 이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책을 읽으면 평행우주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그것을 인간의 삶에 어떻게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는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평행우주란 내가 지금 여기에도 있고 다른 곳에도 있다는 뜻이다. 이 소설에서 평행우주를 가능케 하는 곳이 바로 자정의 도서관이다. 죽음을 시도한 노라는 생과 사의 중간지대인 자정의 도서관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이 포기했거나 후회하는 인생의 이야기가 적힌 수많은 책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책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다른 노라'의 삶들을 경험한다. 실제 생에서 포기했던 수영선수로, 밴드의 보컬로, 사귀던 남자친구의 아내로, 빙하학자로 등등.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노라처럼 누구에게나 특별한 지점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지점 말이다. 내게도 있다. 이직할 당시 연봉과 브랜드 네임에 이끌려 선택했던 A회사가 아니라 전 회사에서 나를 뒷받침해준 선배가 있던 B회사로 갔더라면, 지금은 남편이 되어 있는 그 남자에게 내가 먼저 그의 팔짱을 끼지 않았더라면.
결혼을 하며 일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가정주부로 살아가던 내게 다시 일해보자는 제안이 왔을 때 그것을 수락했더라면, 2년 전 아이에게 아토피가 왔을 때 하던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했더라면 등등. 이들 말고도 작고 사소한 선택들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사귀지 않은 친구들, 하지 않는 일, 결혼하지 않은 배우자, 낳지 않은 자녀를 그리워하는 데는 아무 노력도 필요 없다. (중략) 후회하고 계속 후회하고 시간이 바닥날 때까지 한도 끝도 없이 후회하기는 쉽다 . -p.391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시점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쓰라리곤 했다. 특히나 결혼을 하고 일을 그만두었던 결정이 내 삶을 지지부진하게 만든 것 같아 자책한 적도 있었다. 그런 자책은 때때로 후회를 불렀다. 그러나 이 책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후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다.
현재를 직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게 최소한의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이 후회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얼룩지게 하는, 그래서 삶의 동력을 떨어뜨리는 일이 후회다. 자책이 후회로 끝나지 않으려면 결국엔 현재로 눈돌리는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은 평행 우주 속 다른 삶을 사는 수많은 나를 상상하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 다른 삶을 사는 노라가 얼마나 많은데." -p.267
우주에 다른 삶을 사는 수많은 '나'가 '존재한다'고 상상해보는 일은 내가 후회하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과는 분명 다른 방식의 사유다. 후회는 내 선택을 실패로 여기는 과정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후회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과거지향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다른 나'를 상상하는 일은 내가 살았을 수도 있는 삶을 생생히 그리는 것이기에 최소한 우리 자신을 과거의 회한에 묶어두지 않는다. 이 소설에선 이것을 후회를 되돌린다고 표현한다. 자신이 포기했던 삶을 살아 본 노라에게 생긴 궁극적 변화는 그 삶이 실제의 삶보다 더 좋고 나쁨을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더 이상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왜일까?
그녀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명해지고 부유해지고 좋은 관계를 만들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겉보기엔 훨씬 더 나아 보이는 삶들 안에도 나름의 고통과 절망과 슬픔과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좋은 삶도, 엉망진창인 삶도, 자신이 내린 선택으로 주도한 삶이어야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죽고 싶을 만큼 의미 없다 생각했던 자신의 인생에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유란 바로 그녀가 살아있다는 자각이었다. 살아있다는 건 평행우주 속 다른 나의 숫자만큼이나 내 안에 수많은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첫 여섯 수만 둬도 변화수는 9백만 개나 된단다. 여덟 수를 둔 뒤에는 2888억 개의 다른 위치가 나올 수 있지. 그리고 그런 가능성은 계속 증가해. (중략) 그리고 체스를 두는 데 올바른 법은 없어. 그저 많은 방법이 있을 뿐이야. 인생과 마찬가지로 체스에서는 가능성이 모든 것의 기본이야." -p.279
우리 삶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십여 년 전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유 캔 두 잇'을 외쳤던 때가 있었다. 꿈을 가지라고 했고 열정과 노력을 요구했으며 아침형 인간이 되라고도 했다. 이미 성공한 자의 경로를 데이터 삼아 따라 해보라고도 했다. 그때는, 내가 누구이든 성공이나 행복에 일관된 방법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와 비교하면 이 소설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 시켜 나가는 방법은 좀 더 진일보한 스토리텔링이란 생각이 든다. 존재를 푸시(push)하지 않으며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여유와 따뜻함이 있다. 수천 수만의 변화수를 만드는 체스처럼 인생에도 올바른 방법 하나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우리를 다독인다.
나는 이 소설의 근간이 되는 양자물리학의 평행우주론이 더 나은 삶에 대한 담론을 바꾸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무엇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내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말이다. 앞에서 말했던, 이 책이 내게 열어준 갈림길은 바로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상상한다. 어떤 평행우주에서 나는 이미 몇 권의 책을 내고 강연회를 다니며 나의 귀한 독자들과 인생에 대한 질퍽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라고. 나는 조금 수줍어할지 모르지만 진지한 모습일 것이다.
"It`s a joke. Nobody knows they`ve got a ticket to that show."*
그런 나의 상상을 부추기는 노래 하나가 있는데, 바로 영화 <머니볼>의 엔딩곡 'The Show'다. 인생이란 쇼의 티켓을 우리가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단다. 그 티켓 한 장이 이미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노라처럼 수많은 삶을 다 살아볼 수는 없겠지만, 그저 지금부터, 우리들 누구에게나 있는 '그것'으로 쇼를 즐기면 되지 않을까. "Just enjoy the show!"**
(*, ** : 영화 '머니볼' 엔딩곡 'The Show'의 일부 가사임)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은이), 노진선 (옮긴이),
인플루엔셜(주),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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