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배려하는, 안전한 명왕성을 만들기 위한 이용수칙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명왕성을 움직이는 건 청소년 운영진이고 저는 그들에게 고용된 코디네이터예요. 저의 주된 역할은 운영진이 뭔가를 결정할 때 하나만 보고 선택하지 않도록 다양한 정보와 참고 사례를 제시하고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라 생각해요. 청소와 건물 관리와 회계 같은, 현실적인 여건상 청소년이 하기 어려운 일들도 맡아 하고요."
공식 직함과는 상관없이 한범씨가 명왕성에서 가장 많이 듣는 호칭은 "저기요"다. 심지어 "사장님"이라 불릴 때도 있다. 명왕성이 청소년자치공간임을 알고는 있지만, 아이들은 이처럼 공간의 '주체'가 되기보다 '이용자'에 머무는 게 아직은 더 편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은근슬쩍 드러낸다. 더군다나 운영진으로 일한다는 것은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일 뿐 아니라 약간의 책임감마저 가져야 함을 의미하기에, 이런 점이 부담이어서인지 선뜻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많지는 않다.
"연초에 운영진을 새로 구성할 때면, 일단은 자주 와서 잘 노는 친구들에게 '이런 거 있는데 해볼래요?' 하고 운을 띄우죠. 아무 반응이 없으면 '회의비도 드린다'고 하고(웃음). 저는 회의도 노동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봐요. 학생들에게 뭔가를 시키고 자원봉사점수로 퉁치곤 하는데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다행히 올해는 운영진으로 아홉 명이나 들어왔고 지금까지 다들 안 빠지고 잘 나오고 있어요."
그러면 회의 분위기는 어떨까. 학교와 가정에서 '자치권'을 행사할 기회를 제대로 누려본 적이 없다면, 제아무리 운영진이어도 어른과 함께 하는 회의에서 청소년이 제 목소리를 내는 게 어디 그리 쉽기만 할까?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음을 한범 씨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또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이들은 기회만 주면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서로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속에서 합의를 이뤄간다는 것을.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스스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한번은 바깥에서 제안이 들어왔어요. 지역주민과 청소년이 어울려 보드게임 하는 자리를 마련하면 어떻겠냐고. 명왕성이 지역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 같아서 회의 때 얘기했다가 바로 '까였'죠(웃음). 저희는 저희끼리 놀고 싶은데요? 그러더라고요.
아이들이 어른인 제 말에 '노'라고 할 수 있다는 게 저는 좋았어요. 가끔은 저도 아이들의 결정에 '그건 좀 아닌데' 싶을 때가 있는데, 대개는 그 결정을 존중하고 어떻게 되어가는지 지켜봐요. 그러면 문제가 드러났을 때 아이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바로잡더라고요. 청소년들이 이와 같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되도록 많이 경험하도록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는 게 어른의 역할이 아닐까 싶네요."
꿀알바부터 스튜디오명왕성까지, '청소년시점'의 사업들
일상적인 공간 운영 말고도 명왕성에서 진행하는 몇 가지 굵직한 사업이 있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19년에 시작한 '꿀알바 프로젝트'다. 청소년의 다양한 활동에 급여를 지급하는 이 사업은, 겉보기에는 보통의 '알바'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그 안에 깃든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 사회는 시험성적을 기준으로 청소년의 능력을 평가하잖아요. 그 외 다른 능력이나 자질은 하찮게 여기거나 소홀하게 취급하고요. 그러다 보니 청소년 스스로도 자기의 관심사나 재능에 자부심을 갖고 계속해나가기가 어려워지죠. 이런 문화를 바꿔보자는 뜻에서 시작한 게 꿀알바예요."
꿀알바는 크게 지역연계활동, 공익활동, 개인활동으로 나뉘는데, 지역 모임이나 단체에서 의뢰한 일을 맡아 하는 것이 지역연계활동이라면, 장애아동과 놀이 프로그램을 함께 한다든지 공적 가치를 지닌 행사의 진행을 돕는다든지 하는 것은 공익활동에 속한다. 또 그림 그리기나 악기 연주 같은 개인활동은, 혼자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녹음이나 촬영 등을 통해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형식을 갖출 때 꿀알바로 인정된다.
아이들은 이 세 영역 가운데 본인이 가장 잘하는 것, 혹은 하고 싶은 것을 골라 지원할 수 있으며, 알바비도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스스로 정해본다. 그러면 운영진이 회의를 통해 누가 무엇을 해서 얼마를 받을지를 결정한다고. 이때 가장 중요시되는 원칙은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꿀알바를 경험하도록 고르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알바비 역시 개인 간 차이가 크지 않게, 또 너무 과하거나 적지 않게 조율된다.
"아이들의 활동이 좀 서툴지라도 꿀알바는 그걸 문제 삼지 않아요. 사실 완성도라는 건 그 활동을 계속할 때 높아지는 거 아니겠어요? 이 사회가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에게는 계속 노력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의욕을 꺾어버린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죠. 저는 아이들이 하고자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지속하려면 동기부여가 필요하고, 그래서 칭찬과 응원과 보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청소년에게 굳이 '돈'으로 보상해야 하느냐는 말을 간혹 듣는데, 지금 시대에 어떤 일의 가치를 인정하는 가장 분명한 지표는 돈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고 봐요. 다만 아이들에게 얘기는 합니다. 결과물이 훌륭해서라기보다는 계속 이런 활동을 해나가라는 의미에서 돈을 지급하는 거라고."
꿀알바 외에 올해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으로는 '스튜디오명왕성'이 있다. 코로나19로 마비된 일상에 숨구멍을 내고자 작년에 시도했던 온라인방송 '명왕성라이브'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면 된다. 다만 이제는 코로나19라는 상황에 따른 궁여지책이 아닌, 청소년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좀 더 집중해서 듣고 이를 많은 이들과 공유하려는 의도에서 준비 중이라니, 이런 점이 어떻게 반영될지 기대해도 좋겠다.
"지역에서 청소년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방식은 보통 설문조사로 한정되죠. 질문을 던져주고 정해진 답에 체크를 하게 해요. 매우 그렇다, 조금 그렇다, 아니다, 매우 아니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숫자일 뿐, 거기엔 아이들의 표정이 없잖아요.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요. 스튜디오명왕성은 숫자로 치환될 수 없는, 저마다 다른 표정과 목소리를 지닌 개개인의 메시지를 잘 담아내서 '이런 사람이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세상에는 더 많은 '명왕성들'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