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박용규
정부는 동학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교주를 처형한 조정은 '그 잔당'을 소탕하고자 관헌을 풀어 동학도를 닥치는대로 검거하고, 동학을 적대시해온 지방의 유생들은 이 기회에 '주자학의 이단세력'을 뿌리 뽑고자 은신중인 신도들까지 관에 신고하였다.
이조 봉건정부의 동학신도에 대한 추궁은 초대 교조 처형 후에도 일관해서 엄중하게 계속되어 가장 고난이 많은 시대로 교의(敎義)는 관헌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상민(평민) 출신인 최시형은 2대 교조로서 전전히 체포를 피해가면서 그 실무를 조직력에 의해 농민들 층으로 점차 전국적인 비합법적인 교단조직을 쌓아 올라갔다. (주석 1)
최시형이 제2대 교조가 되어 동학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 시기는 중년에 접어드는 38세 때이다. 그에게는 교조의 억울한 죽임을 풀어주는 신원운동과 함께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려는 동학의 창도정신을 구현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졌다. 또한 시급한 것은 교조가 남기고 간 말씀과 글을 묶어 간행하는 일이었다. 쫓기는 처지에서 어느 것 하나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의 추적을 피해 산간마을에 은신하면서 포교활동을 계속하였다.
기독교의 구약에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이며 가나안을 찾았다지만, 최시형은 1898년 원주에서 관군에 체포될 때까지 35년을 쫓기는 신분으로 동학을 지키고 확산하고 각종 사료를 펴냈다.
주인(主人)은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애통하여 어디로 행할 바를 모르다가, 영덕 직천(直川)에 있는 강수(姜洙)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강수는 마침 풍습(風濕)이 다 낫지 않아 초당(草堂)에 누워 있다가, 놀라 주인의 손을 잡고, 선생께서 당한 욕(辱)의 전후사를 듣고 슬피 눈문을 흘리며 애통해 했다. 강수의 처 박씨도 대성통곡을 하였다.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다가 새벽에 밥을 지어 밥 한 바리를 싸서 새벽에 나아가 동쪽으로 향했다. 마을의 닭들이 사방에서 울고, 마침 비가 내려 머뭇거리다, 중도에 영해(寧海)에 이르러, 도인의 집을 찾아 잠을 자고, 다음날 길을 떠나 평해(平海) 황주일(荒周一)의 집에 이르렀다. (주석 2)
주석
1> 오지영, 『동학사』, 102쪽, 1938, 문의각.
2> 「도원기서」,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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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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