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핀 줄기마다 암꽃이 달려있지 않다. 자세히 보면 수꽃만 피어있는 줄기들이 더 많다. 꽃을 피우는데 많은 정성과 에너지를 쓴다는 식물로선 수꽃도 최소한만 피우면 될것이다. 그럼에도 엄청나게 많은 수꽃을 피우는 밤나무. 덕분에 많은 생명이 살아갈 수 있다.
김현자
밤나무의 밤꽃은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늦은 봄 유백색의 꽃들이 나무 가득히 피어나면 다소 야릇한 꿀 냄새도 나고 금세 눈에 띄니까요. 그런데 이 꽃들은 사실 꽃가루 만드는 일을 하는 수꽃이랍니다. 밤나무 암꽃도 한번 찾아보세요. 수꽃들이 달리는 줄기 조금 위쪽에 연둣빛의 유백색 암술머리가 달린 듯한 아주 작은 암꽃이 있어요. 물론 밤송이는 이 암꽃이 자라 만들어집니다. - <내 마음의 들꽃 산책> 253쪽.
특별한 꽃인데도 그동안 가까이서 들여다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골목에 피어난 꽃을 찍는다고 마을버스를 여러 번 놓쳤을 정도로 꽃이라면 모두 좋아하는데도 말이지요.
높은 나무에 피는 꽃이라 그랬겠지요. 해마다 가까이에서 다시 피어주는 흔한 꽃이라 그랬을 것이고요. 그러니 특별한 꽃인데도 멀찍이서 빙긋 웃으며 바라보곤 했더랬고요. 이런 밤꽃을 책 덕분에 처음으로 자세하게, 그리고 자주 들여다보며 미처 모르고 있던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밤꽃은 풍매화입니다. 수꽃의 수술이 바람 따라 이동해 암꽃에 닿아 수정하게 되겠죠. 그러니 곤충이 날아들지 않아도 수정은 가능할 것이고요. 그럼에도 수꽃을 정말 많이 피워내는 밤나무랍니다. 어쩌면 암꽃 한 송이 수정하고도 남을 엄청난 양의 수꽃들을 말이지요.
식물 관련 책들에 의하면, 식물들은 꽃을 피울 때 가장 많은 정성과 에너지를 쓴다고요. 수정을 제대로 해야 번식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곤충을 끌어들이는 데 유리한 쪽으로 진화를 한 결과 다양한 색과 모양의 꽃이 피는 것이라고요. 밤이나, 흐린 날 혹은 비 오는 날에 꽃잎을 오므리는 꽃들이 많은데요. 그처럼 꽃이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하지요.
애써 많은 수꽃을 피우는 건 밤나무로썬 엄청난 낭비일 텐데 왜 그렇게 하는 걸까요? 물론 밤나무만의 이유가 있겠지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밤나무가 그처럼 엄청난 양의 수꽃을 피우는 덕분에 수많은 생명이 보다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에서 이 부분을 읽지 않았다면 올해도 지난해처럼 멀찍이서 보는 것으로 안부를 주고받고 말았겠지요. 책 덕분에 밤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까지 하며 밤나무가 왈칵 고맙게 와닿았습니다. 아이를 축복해주던 그때처럼 은혜롭게 와닿고요. 밤꽃에 대한 새로운 감동과 함께 힘든 날들을 이겨온 가족들이 새삼 더 고마운 요즘입니다.
'여전히 제 마음을 흔드는 존재는 들꽃입니다.' - <내 마음의 들꽃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