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고보의 맹휴(1926)최병규가 춘천고보에서 '퇴학처분'을 받은 것은 그해 10월 4일에 시작된 맹휴사건 때문이었다. 춘천고보 2, 3학년생들이 학교당국과 도학무국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교무주임 모리(영어담당)를 배척하는 맹휴를 단행했던 것이다.
동아일보
위에서 제기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제 최병규가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하나하나 직접 살펴볼 수밖에 없다.
지난 7월 19일 국민의힘 소속 정경희 의원은 최재형 예비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최재형 전 원장의 할아버지 최병규 선생은 강원도 평강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춘천고보 3학년 재학 중 순종황제가 승하하자 상장(喪章) 달기에 앞장섰다가 퇴학당했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정경희 의원의 주장은 최병규의 아들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내용과 비교해 보더라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춘천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6년 4월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서거하자 갑조 조장 이영길과 같이 전교 학생들에게 '순종서거애도 상장(喪章) 달기' 운동을 주도했다. 2주 동안 상장을 단 이 운동은 일본경찰과 일본인 교사 삼광미(森廣美) 교무주임의 추궁으로 사건이 확대되었다. 아버지는 불온학생으로 낙인 찍혀 일본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지만 좌등원장(佐藤元藏) 교장의 수습으로 일단락되었다.
순종 서거 당시 순종에 대해 애도를 표하는 것은 불온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자의든 타의든 대한제국을 일제에 넘긴 순종의 죽음에 일제는 적극 나서서 조의를 표했고, 조선인들이 조의를 표하는 행위 역시 막지 않았다. 다만 그 정도와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을 뿐이다.
최영섭의 회고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시 춘천고보 학생들은 순종의 서거에 대한 '봉도'를 위한 휴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실제로 춘천의 사립 정명여학교는 학교 차원에서 휴교를 했다. 그러나 춘천고보는 당국의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휴교를 단행하지 않았다. 이에 춘천고보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일제히 등교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휴교를 하루만 했다는 언론보도(<매일신보>)도 있고, 여러 날 했다는 언론보도(<시대일보>)도 있어 그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3학년 을조 조장을 맡고 있던 최병규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을 받아 추궁을 당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퇴학으로 이어질 사안은 아니었다.
정작 일제가 노심초사한 것은 순종의 서거를 계기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불온한 언동'이었다. 일제는 7년 전 고종의 인산을 계기로 일어났던 3.1운동도 경험한 바 있었다. 실제로 순종 서거 이틀 후인 4월 28일에는 '송학선 의사의 의거'가 있었고, 인산일에 맞춰서는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박두종, 이천진 등의 학생들은 당연히 퇴학은 물론 혹독한 고문과 함께 감옥살이까지 감내해야 했다.
6월 10일 전후로 춘천에서도 천도교교구장 허계훈의 집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긴장도 있었지만, 이영길과 최병규 등 춘천고보의 3학년 조장은 1926년 당시 학생들의 슬픔과 분노를 6.10 만세운동과 같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낼 정도의 의지와 능력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병규가 춘천고보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은 그해 10월 4일에 시작된 '맹휴사건' 때문이었다. 춘천고보 2, 3학년생들이 학교당국과 도학무국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교무주임 모리(영어담당)를 배척하는 맹휴를 단행했던 것이다.
모리는 수업시간에 술을 먹고 교실에 들어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주정을 한다든지, 운동장 청소를 제대로 못했다고 돌로 학생의 머리를 내리치기도 하는 수준 미달의 교사였다. 그런데도 학교당국은 최갑도, 최병규 등 4명의 주동자를 맹휴시작 다음날 새벽에 전광석화와 같이 '퇴학 처분' 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고, 이는 학생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맹휴가 1학년으로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측에 설득된 학부형이 나서서 학생들의 등교를 설득하면서 춘천고보 맹휴사건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중단됐다.
춘천고보 맹휴사건에 대해 최영섭은 회고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는 1926년 10월 4일을 기해 한국인 학생들을 멸시하고 구타, 폭언을 일삼는 일본인 교무주임 삼광미 교사 배척을 위한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일본경찰이 아버지를 체포하려 하자 교장이 사태수습에 나섰다. (중략) 결국 일본 당국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과 함께 강제로 고향으로 귀향시켜 평강에서의 3년 거주제한, 일명 금족령을 내렸다.
최영섭은 아버지 최병규를 비롯한 4명의 학생이 퇴학당한 춘천고보 맹휴사건의 실체를 좀 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춘천고보 맹휴사건의 기본 성격은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해볼 때 '한국인 학생을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 배척운동'이라기보다는 '학생을 구타하는 등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한 모리 교사 배척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당시 언론은 '조선인 차별의 언행'을 하는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는 다른 학교의 맹휴를 보도할 때는 "일본인 교사 배척"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춘천고보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이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맹휴에 나섰던 사건은 3년 후인 1929년에 있었다. 그해 5월 춘천고보 학생들은 "조선역사 조선문법 조선어 시간을 연장할 것. 독서의 자유를 줄 것. 학우회를 일체 생도에게 위임할 것" 등을 내걸고 맹휴를 추진했다.
그런데 사전에 발각되면서 주동학생 6명이 무기정학을 당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춘천고보 학생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호응해 끝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주동학생 6명이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때도 학교당국은 이들에 대해 출교조치를 단행했다. 춘천고보 학생들은 1938년에도 독립운동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으로 이연호 등 137명이 검거되고 36명이 송청되는 등 큰 수난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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