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직전의 최시형 선생 모습최시형 선생
박용규
고등재판소의 '판결문'을 살펴보자.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1866년)에 간성에 사는 필묵 상인인 박춘만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동학을 전수받아 선도(善道)로 병을 치료하고 주문(呪文)으로 신(神)을 내리게 한다고 하며 여러 군과 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의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8자 강신문(降神文) 및 동학원문(東學原文)의 제1편 포덕문ㆍ제2편 동학론ㆍ제3편 수덕문ㆍ제4편 불연기연문과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부적으로 인민을 선동하고 무리를 규합하였다.
또한 복주인(伏誅人) 최제우의 "만년지상화천타(萬年枝上花千朶)" "사해운중월일감(四海雲中月一鑑)"라는 싯구를 사모하고, 법형법제(法兄法弟)의 실심과 경신을 따라 법헌(法軒)의 호를 부르며 해월의 인장을 새겨 교장ㆍ교수ㆍ집강ㆍ도헌ㆍ대정ㆍ중정 등의 두목(頭目)을 각 지방에 임명하였다. 또한 포(包)와 회소(會所)를 설치하여 무리를 모았는데, 1,000만 명에 이르렀다.
법에 따라 죽은 최제우를 신원한다고 하여 지난 계사년(1893년)에 신도 몇 천명으로 대궐에 나아가서 상소를 올렸다가 바로 해산을 하였고, 보은의 장내에 많은 무리를 모았을 때에 순무사의 선유 때문에 각자 해산하였다.
갑오년(1894년) 봄에 이르러 피고의 도당인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고부지방에서 같은 패를 불러모아 기세를 타고 일어나서 관리를 해치며 성과 진을 함락시켜 양호(兩湖)의 땅이 썩어 문드러져 불안한 지경에 이르렀다. 피고가 이때에 호응하여 지휘한게 없다고 하지만 난리의 단계와 재앙의 근원을 살펴보면 피고가 주문과 부적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데서 연유하였다. (주석 1)
해월 최시형은 옥중에서 심한 설사 그리고 목에 씌운 무거운 칼로 반주검 상태에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로 동학주문을 암송하는 등 조금도 굽히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미 생사를 뛰어넘어 초탈한 것이다. 5월 12일 법부대신 겸 평리원재판장 조병직과 수반검사 윤성선, 법부협판 겸 수반판사 주석면이 다시 법정을 열고 여러 차례 심문하였다. 그리고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로서 사형을 최종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72세인 1898년 6월 2일(양력 7월 20일) 오후 2시 경성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처교죄인 동학괴수 최시형(處敎罪人 東學魁首 崔時亨)〉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교수대에 태연히 올랐다.
검사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나 죽은 뒤 10년 이내에 동학의 주문 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리라." (주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