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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아호 짓고 고향에서 계몽운동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7] 해공의 와세다대학 3년여의 학창시절

등록 2021.08.14 17:07수정 2021.08.1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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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공 신익희 동상. 서울시 강동구의 강동역 근처에서 찍은 사진.
해공 신익희 동상. 서울시 강동구의 강동역 근처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와세다대학 시절, 그는 '메기의 입'이란 별명이 붙었다. 다부진 몸가짐과 입을 굳게 다물고 듣기를 다하여 쉽게 입을 열지 않고, 상대의 말이 끝나면 논리정연한 언변을 토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아무리 전문적인 내용이라도 상대가 알아듣기 쉽도록 전달하였다. 뒷날 국회의장으로서 명사회를 보거나, 대통령후보가 되어 한강변에서 40만 인파를 상대로 한 명연설 등은 이때부터 다듬어진 변술이었다. 

그는 대학시절에 해공(海公)이란 자호를 지었다.

"해자(海者)는 심야(心也)요 공자(公者)는 아야(我也)란 말이 있다. 바다와 같이 넓고 넓은 마음에 멸사봉공하거나 공선사후(公先私後)하는, 추호도 사심없는 공적(公的)인 대아(大我)라는 뜻이다."(「구술 해공자서전」)

해공이란 호는 그의 60평생을 그대로 반영하는 데 모자라지 않는다. 과연 그는 중국 망명기 독립운동이나 환국 후 정치활동에서 넓은 바다이고 선공후사의 큰 그릇이었다.

여름 방학이면 관부연락선을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젊은 아내 그리고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조선의 민중이다. 봉건사상과 낡은 인습, 여기에 총독부 관리들의 억압과 수탈에 시달리는 동포들을 상대로 계몽운동을 벌였다.

고향 마을에는 광동의숙을 차려 신문화ㆍ신교육을 시키고 축구단을 조직하여 스포츠 정신을 보급하였다. 와세다대학에서 두각을 내고 있다는 조선학생이 고향에 와서는 계몽운동을 빙자한 의식화 집회를 하면서 읍내 헌병분견소가 긴장하고 뒤를 캤다. 


어느해 여름 방학 때는 서울 왕십리에서 전차를 탔는데 일본인 학생 3~4명이 승객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지켜보다가 더욱 심해지자 위엄있게 나무랐지만, 그들은 오히려 "조센징이 감히 내지(內地) 사람에게 훈계를 하다니!"하며 반발했다. 신익희는 스포츠로 단련된 주먹을 휘둘러 이들을 제압하고 파출소에 끌려가서도 명쾌한 논리로 일인들의 행패를 꾸짖었다.

와세다대학에서 그는 학구적으로나 리더십으로 한인 유학생들을 물론 일인학생과 교수들로부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10여 명 유학생 모두가 우수했고, 1914년 4월에 창간한 『학지광』은 연 2회 발행되는 초라한 모습이지만 일본 내 조선인들의 대변지 역할을 하는데 모자라지 않았다. 『학지광』의 발행에 그는 알바로 모은 돈을 투자하였다.


와세다대학 3년여의 학창시절을 그는 <나의 대학시절>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의 대학 시절인 40년 전을 회고할 때, 문득 얼마 되지 않은 감 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대학생들의 사고 경향과는 다소 다를지는 모르나, 솔직히 그 때의 심경을 회고하면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는 긍지를 가졌다. 그 때에 그리 흔하지 아니한 대학생이 된 것을 한 자랑거리로 알고 마음 깊이 자부하였다.

둘째, 이 자랑은 자라 우월감으로 되었다. 대학생으로서의 철학ㆍ정치ㆍ법률ㆍ경제 등에 광범한 영역으로 학습을 하고 논리학ㆍ심리학ㆍ사회학 등에 대하여 교수의 강의를 듣고 전문 서적을 읽는 동안,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배우고 또한 아는 듯하여 이러한 학문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나는 일단 나은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을 경시하는 우월감이 있었다.

셋째, 이 우월감은 어느 사이 회의(懷疑)와 자하(自下)로 바뀌었다. 널리 여러 학자의 학론(學論), 그 정의(定義)를 읽는 동안 그것이 구구이 다르고, 또 그것 모두 일면의 진리를 가졌으면서도 일면 결함성 또한 가지어 오래 동안 정설(定說)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 모든 학설(學說)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더욱 철학자 중에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 자기자신의 학문의 영역, 지식의 범위가 얼마나 묘소(渺少:매우 넓은 상태)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참된 진리는 평생을 두고 탐구하여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자각의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등대불이 비치는 범위가 넓어지면 질수록 그 어두움이 큰 데에 놀란다."던 톨스토이의 말에 새삼 감명 받았다. (주석 3)


주석
3> 앞의 책, 121~122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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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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