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시는 8월 14일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 화단에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의 생가터 표지판을 세웠다.
윤성효
"국가보훈의 친절도 성의도 영혼도 없는 답변을 우리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심사 관련한 정보공개를 요청할 것이다." - 열린사회희망연대
"심사 대상이 수백 명이다. 불가피하게 포상 여부와 간략한 미포상 사유 중심으로 1차 심사 결과를 안내하고 추가 문의가 있으면 상세 안내한다." - 국가보훈처
김명시(金命時, 1907~1949)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재심)했던 열린사회희망연대와 보류를 통지한 국가보훈처가 각각 이같이 밝혔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9년 1월 포상 신청(1차)했고, 국가보훈처는 같은 해 11월 포상 제외 결정 통지를 했다. 이에 열린사회희망연대가 자료를 추가해 올해 7월에 재심을 신청했으나, 보훈처는 8월 회신을 통해 보류 통지를 결정했다.
보훈처는 김명시 선생에 대해 "2019년 심사에서 1925년 8월 경남 마산에서 고려공산청여년회 가입, 1928년 6월 동방피압박민족반제대동맹 조직, 1929년 10월 북만주 길림성 아성현에서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대동맹 조직 등의 독립운동 공적이 확인됐다"면서도 "광복 후 남한으로 귀국한 뒤 1949년 사망 시까지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아 행적 불분명의 사유로 보류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훈처는 "1949년 9월 신문 기사에서 김명시 선생이 모종의 혐의로 부평경찰서에 유치되었고,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소개되었던 점과 관련하여 선생의 마지막 활동이 확인되는 1949년 11월부터 사망 시까지의 행적에 대해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보훈처는 "보류 사유에 관한 소명자료가 추가로 확인될 경우 가능하나, 이번에 제출한 자료는 이미 지난 심사에 반영되어 공적 재심사가 어려움을 알려드린다"고 설명했다.
김명시 선생은 누구?
창원마산 출신인 김명시 장군은 1925년(18세)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1927년 재학 중 상하이로 파견되어 동방피압박민족반제대동맹을 조직했으며,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간 복역했고, 1939년 출옥한 뒤 팔로군에 들어가 항일 투쟁했다. 이후 테진, 베이징 등지에서 항일전을 벌였다. 한 손에는 총과 다른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에 맞서 싸운 그는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김명시 선생은 광복 후 귀국했고, 1949년 10월 10일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망했다. 당시 김효석 내무부 장관은 김명시 선생이 북로당 정치위원이고, 유치장 수도관에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보훈처로부터 2019년 11월 회신을 받은 뒤, 1년 넘게 자체적으로 자료 조사를 벌였다. 이 단체는 국토통일원에서 펴낸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자료집>(1988년)에 근거해 "김명시 선생이 북로당 정치위원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또 김명시 선생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 동조했는지에 대해, 이 단체는 "북에 있는 신미리애국열사릉을 보면 김명시 선생과 같은 시기 남쪽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활동가들이 여럿 있지만, 거기에 김명시 선생은 없다"고 설명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부천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망했던 김명시 선생의 당시 혐의와 행적 등을 파악하기 위해 경기경찰청에 공문을 보냈고, 경찰로부터 '자료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했다.
김명시 선생의 광복 후 행적에 대해, 이 단체는 "당시 당국의 주장대로 자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일제 앞잡이였던 친일경찰에 고문을 받는 것에 치욕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며 독립운동 행적은 너무나 뚜렷하기에 포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